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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남편 되기, 너무 쉽다

2018.06.18
ⓒ조선일보
‘아내와 의견 충돌이 생기면 “생각을 좀 해보자”고 말한다’, ‘아내를 항상 인격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부부싸움 시 아내를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던지지 않는다’. 네이버 카페 ‘아빠학교’의 운영자가 만든 ‘좋은 남편 진단표’에 포함된 항목이다(위 15개 항목은 요약본이며, 원본은 6개 카테고리의 총 30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봐도 부부관계, 넓게는 인간관계에서 기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가정폭력은 범죄라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자니 참담한 심경마저 든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에서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아내(배종옥)가 이혼을 요구하자, 남편(배성우)은 “내가 평생 너 말고 썅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웠냐, 돈을 안 벌었냐? 아님 널 패길 했냐, 애들을 팼냐?”라며 이혼당할 이유가 없음을 피력하는 장면이다. 남자는 그 정도면 좋은 남편이라고 (상욕을 하며) 당당하게 외친다.

이어서 기본에서 한 걸음 나아간 항목이란 게 ‘아내가 시장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즉시 달려가 물건을 받는다’, ‘아내가 밥을 차려주면 반드시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먹는다’인 걸 보면, 배우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예의와 배려를 굳이 강조해야 하나 싶은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든다. 시장 바구니를 현관에서 부엌으로 옮기기만 해도 좋은 남편이라 만족해야 하나? 좋은 남편이라면서 직접 장을 보거나 직접 밥을 차릴 생각은 없는 건가?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 카테고리에 속한 ‘아이와 매우 잘 놀아준다’라는 항목에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가사와 육아에서 본인을 조력자로만 인식할 뿐, 당사자로서의 책임의식은 찾기 어렵다. 육아노동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만 포함하지 않으며, 아내를 배려하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 척한다. 좋은 남편의 기준이 이렇게 관대해도 되는가.

JTBC ‘효리네 민박’의 이상순이 이른바 ‘국민 남편’으로 등극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남성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띄워주는 데 너무 익숙하다. 같은 자리의 여성은 쉽게 지워지고 간과된다. 프로그램 안에서 이효리가 능숙하게 집안일을 하는 모습은 비교적 담담하게 넘어가지만, 이상순은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기만 해도 ‘살림 박사’ 호칭이 붙는다. 이효리가 무언가를 부탁하고, 이상순이 그 요청들을 잘 수행해내면서, 이상순에게는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남편의 이미지가 생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정작 듬직한 건 이효리가 보여주는 지휘자의 모습이다. 가사노동과 민박객 맞이를 끝없이 계획하고 관리하는 총책임자는 이효리다. 그렇기에 집안 구성원에게 지금 해야 할 일을 할당하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상순이 국민 남편이라면 이효리는 더더욱 ‘국민 아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 아내는 없다. 이상순을 비롯하여 최수종, 차태현, 구혜선 남편 안재현, 추자현 남편 우효광까지 국민 남편은 풍성한 계보를 자랑하는 것과 대비된다. 국민 아내가 되는 길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좋은 아내는 완벽에 균형까지 갖추어야 한다. 육아에 헌신하지만 그 이유로 남편 돌봄을 소홀히 하지 않고, 알뜰하지만 남편의 소비에는 불평하지 않고, 시가 봉양하며 자기 삶도 잃지 않아야 한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어쩐지 ‘개념녀’라는 말의 기준과 비슷하다. 반면, 좋은 남편의 기준은 기준치를 최대한 아래로 끌어내려 놓고, 누구나 ‘나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지’라고 당당할 수 있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 사회에서 좋은 아내가 되는 게 가능한가는 차치하더라도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해서 이득을 얻는 건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다.

“남편이 회사 다니는데 그래도 집안일 하려고 하네, 대단하다”, “시키면 하잖아, 잘 못 해도 그게 어디야”라는 남편 칭찬은 익숙하지만, 남편보다 많은 가사노동을 맡는 나, 남편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대단한 남편과 사는 보통의 아내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조금 달라졌다. 친구가 남편과의 일화를 말할 때, 나 또한 익숙한 방식으로 친구 남편을 칭찬하려다 멈칫한다. 대신 나의 관심은 친구를 향하고, 그의 멋진 점을 찾아 대단하다고 말한다. 남자의 장점에 집중하느라 놓쳤던 수많은 여자들의 장점을 보려 한다. 더불어 사회의 바람직한 아내상으로 자기검열 하지 않은 채 나의 좋은 점을 공들여 살피고 싶다. 좋은 남편의 기준을 높이고, 무심히 지나쳤던 아내들의 노고를 발견하고 인정할 때가 되었다.

글. 사월날씨
결혼생활은 좋아하지만, 결혼제도는 고통스러운 결혼 4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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