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② 여성에게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필요하다

2018.05.15
3월 9일, 그러니까 ‘여성의 날’ 바로 다음 날, ‘래프 라우더(Laugh Louder)’라는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기획했다. 여성들은 말할 준비와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서로의 이야기에 웃고 웃길 준비 또한 되어 있으니 작은 무대라도 일단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취지였다. 그리고 지난 4월 29일, 관객들을 모아놓고 쇼를 진행했다. 여성과 섹스를 주제로 한 이 쇼에서 스피커들이 오르가즘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말할 때, 남성 중심의 기이한 성 문화를 빈정댈 때, 어릴 적 우연히 읽었던 책에서 성적 욕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관객들은 크게 웃었다. 실컷 웃으며 쇼를 지켜보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코미디를 보며 불편하지 않은 경험이 정말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여성 코미디 페스티벌을 만든 한 여성은 말한다. “남성이 무대에 올라가면 관객들은 웃을 준비를 한다. 여성에게는 다른 레이어가 있다. 관객들은 말한다. ‘네가 웃긴 걸 나한테 증명해봐.’” 당연히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다. 미디어에서 여성 예능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지적을 할 때마다 나오는 반박 역시 ‘여성들은 웃기지 않다’는 편견이다. 그러나 여성이 웃기지 않은 게 아니라, 그동안 코미디 역시 남성 중심의 문화를 바탕으로 공유되어 왔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을 지칭하는 욕설을 우스갯소리랍시고 하고, 외모가 다수의 기준에 만족스럽지 않은 여성을 비아냥대고, ‘ㅇㅇ녀’로 여성을 라벨링하며 비웃는 데다 소수자에 대한 고민마저 없는 코미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웃어왔다. 해외의 상황도 이와 같아서 ‘VICE’ 매거진은 여성 코미디언으로 살아남기 힘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메인스트림 혹은 지방에 있는 코미디 클럽의 문제 중 하나는 인종차별, 호모포빅, 그리고 여성혐오에 관한 소재들이 계속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쇼는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조금 더 다양하게 만들어보자는 시도다. 마이크와 무대만 있으면 주류 코미디 시스템과 관계없이 판을 벌일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의 인기 콘텐츠 중 하나인 앨리 웡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베이비 코브라’는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트위터에서는 장녀로서의 경험이나 여성이기 때문에 리본 달린 속옷밖에 입을 수 없었던 경험 등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진행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여성이라면 이 주제들로 어떻게 코미디를 구성할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이후, 여성들이 말하고 만나는 자리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감각,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화답해줄 사람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감각이었다. 그동안 여성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자리는 남성에 비해 많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시위에서, 컨퍼런스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다른 이들 앞에 서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심지어 코미디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공감과 이해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올해 초 골든글로브의 TV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아마존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슬’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아가던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도움을 받아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주인공 미리암 미지 메이슬 역을 맡은 레이첼 브로스나한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여성을 끌어올려주는 것이다.” 여성이 말할 수 있는 판을 까는 것, 무대 위에서 불편하지 않은 농담으로 다른 여성들을 웃기고 그들 역시 큰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 여성의 코미디에 웃어주는 것 모두 “다른 여성을 끌어올려주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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