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희’, 이 시대의 우주 판타지아

2018.05.03
1990년대 무렵 한국 SF 팬들에게 전설적인 책으로 불리던 만화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 밤이야기’ 또는 이후의 표기를 따르자면 ‘2001 SPACE FANTASIA’라는 책이었다. 2009년에 나온 정식 발매판 해설에는 당시에 한국에 유통된 번역판은 1980년대 일본에서 처음 나온 만화의 해적판이었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한 번 본 SF 팬은 영영 잊지 못할 만한 만화라고 할 만하다며 제법 자주 언급되었던 기억이 난다. 2009년 정식 발매판이 나왔을 때 역시 가장 먼저 서점에 달려 가 이 만화를 샀던 사람들은 해적판을 접하고 그 기억을 잊지 못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얼마 전 반바지 작가의 새 만화책 ‘슈뢰딩거의 고양희’를 읽었다. 책을 다 읽은 소감은, 이런 책이라면 “우리 시대의 2001 SPACE FANTASIA”로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2001 SPACE FANTASIA’는 아서 클라크 같은 SF 고전 황금기 시대 작가 느낌의 복고풍 감각으로, 모험과 탐험 중심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구도적이고 사상적인 깊은 갈등을 거대하게 담아내는 듯한 감상을 주었다. 차가운 현실감과 신비로운 느낌을 동시에 담고 있는 금속 기계와 검은 우주 풍경을 날렵하게 그리면서 그런 이야기를 풀어내면, 고전 황금기 SF의 흥취를 멋지게 포장해서 전해주기에 과연 부족함이 없었다.

‘슈뢰딩거의 고양희’에서도 바로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자주 접할 일이 없는 문제를 환기하게 해주는 진지한 소재들, 현실감과 신비감을 동시에 살려주는 멋진 그림, 동시에 우주, 지능, 먼 미래와 같은 거대한 소재를 풀어내면서 깊은 느낌을 주는 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짧게 끊어지는 단편 이야기들을 여럿 모아놓은 책이며, 그중 몇 가지 이야기는 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2001 SPACE FANTASIA’와 ‘슈뢰딩거의 고양희’는 그 구성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슈뢰딩거의 고양희’의 마지막 이야기로 편집되어 있는 ‘할아버지의 시계’는 50년대 SF물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데다가 호시노 유키노부가 자주 쓰던 옛날이야기와 미래 배경의 SF 소재를 엮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정말 ‘2001 SPACE FANTASIA’에 실려도 잘 어울릴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기도 하다.

물론 30년의 격차를 두고 있는 만큼, ‘슈뢰딩거의 고양희’와 ‘2001 SPACE FANTASIA’는 차이점도 뚜렷하다. ‘슈뢰딩거의 고양희’에는 한두 페이지로 끝나는 짧은 이야기가 많아서 답을 보여주는 형태의 이야기보다는 독자에게 고민과 질문을 안겨주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태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짧으면서 그저 소재의 특징 한쪽만을 강조하는 구성은 인터넷 SNS 시대의 감각과도 어울린다. 앞서 언급한 ‘할아버지의 시계’처럼 ‘2001 SPACE FANTASIA’ 분위기로 차근차근히 사건을 쌓아올리고 절정과 결말을 통해 비밀을 드러내며 감동이나 충격을 주는 방식의 이야기도 책 속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야기들은 단 한 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짧은 가운데 온갖 생각을 담아 터뜨리는 것에 가깝다. 이런 점 때문에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소재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다른 느낌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만화 매체의 특성을 재치 있게 응용한 시간 여행 이야기, ‘한 컷 타임머신 만화’는 과연 천재의 솜씨는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해줄 정도였다.

‘2001 SPACE FANTASIA’가 상대성이론 속에서 긴 시간 먼 우주를 여행하는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었다면, “슈뢰딩거의 고양희”에는 양자론의 기이함과 거기에 엮일 수 있는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소재를 살려 쓰는 것들이 유독 많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그런가 하면, 실재성과 관념 문제를 따지는 복잡한 이야기를 펴다가, 문득 “대학생 농담” 같은 수준의 실없는 이야기를 문득 던지며 강약을 조절하기도 한다. 이 역시 이런 식의 ‘140자 소설’ 부류의 아주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들만의 재미 아닌가 싶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책 내용보다는 책 밖에 있었다. 호시노 유키노부는 일본 만화계의 거장으로 인정받아 위대한 작가로서 많은 수입을 올렸지만, 반바지의 첫 책은 그에 비해서는 여전히 훨씬 적은 관심만을 받고 있다. ‘뛰어난 걸작은 으레 외국의 유명 작가들 것이겠지, 한국의 안 알려진 작가가 얼마나 좋은 것을 쓰겠냐’는 식의 생각이 퍼져 있어서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SNS를 통한 관심 이외에 도대체 이 정도의 책이면 지금보다는 미디어나 비평 분야의 주목을 좀 더 받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싶어 의아스러웠다.

시간 여행 이야기, 마법을 과학으로 패러디하는 방식의 이야기, 복고풍 SF 감각의 거창한 소재,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양자론의 기이한 소재들을 과감하게 있는 그대로 뿌리는 이야기들이 유난히 많은 책이다. 요즘 만화에서 자주 보이는 번역체 아닌 번역체스러운 말투도 가끔 들어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가깝게 느끼는 독자라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런 대목을 읽어나가는 것이 약간은 피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라도 일단은 한번 도전해볼 만한 책이라고 본다. 백수십 편이 훨씬 넘어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의 바다 한중간에 빠지는 감흥을 좋아할 수만 있다면, 아무 페이지나 펼쳐 딱 한 페이지를 읽고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 페이지에 나온 소재로 고민해보는 놀이를 몇 번이고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록

SPECIAL

image 걸크러시 콘셉트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