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달, 여성 패션 매거진들의 목소리

2018.03.12
최근 SNS에서는 ‘젠더 프리(Gender Free)’라는 제목으로 여성 배우들이 남성 배우들의 유명한 대사를 바꿔 말하는 짧은 동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햄릿’ 같은 고전에서부터 영화 ‘베테랑’ 속 “어이가 없네.”까지, 유명한 남성 캐릭터들의 대사가 여성 배우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습이 담긴 영상은 다른 아이돌, 배우들이 나온 영상을 제치고 금세 조회 수 13만을 넘겼다. 이 영상을 제작한 것은 여성 패션 매거진 ‘마리끌레르’다. ‘마리끌레르’는 ‘젠더 프리’ 기획 이외에도 3월호의 모든 지면을 각 분야의 여성 화보와 인터뷰로 채웠다. ‘여성 법안을 낸 정치인들’에 참여한 유선애 에디터는 “25주년 기획으로 피처팀뿐만 아니라 뷰티, 패션 등 다른 팀에서도 여성 관련 이슈를 통합해서 한 권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커버 또한 김연아, 김고은, 블랙핑크 등 대중문화 분야에서 활약 중인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으로만 채웠다.

다른 패션 매거진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성 인권과 관련된 이슈를 다뤘다. ‘더블유 코리아(W Korea)’ 3월호에서는 책을 두 권으로 나눠 각각 ‘걸스, 비 앰비셔스! (Girls, be ambitious!)’와 ‘보이스, 비 어도러블! (Boys, be adorable!)’이라는 제목을 달아 세트로 발매했다. ‘더블유 코리아’의 황선우 피처 디렉터는 “교과서에서부터 남성들에게만 향하던 해묵은 관용어구를, 더블유가 지향하는 당당하고 멋진 여성 독자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성판의 문구에 들어갈 단어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했다. ‘어도러블(adorable)’은 “주로 여성에게 사용되는 단어의 성역할을 바꾸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여러 형용사의 아이디어를 내던 중”에 채택된 단어다. 그는 “야망에 찬 여자와 사랑스러운 남자, 아름다운 조합 아니냐”고 되물었다. ‘엘르(ELLE)’에서는 ‘타임즈 업(Time’s Up),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이라는 기획을 내세웠다. 표지에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쓴 유일한 사례다. ‘엘르’ 김아름 피처 디렉터는 “‘엘르’가 ‘여성’이라는 명사다. 3월은 세계 여성의 날이 있어서 전체 테마를 ‘여성’으로 잡았다.”며 “마침 미국판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여성의 날을 기념해 존 케리 전 미국 국무장관과 여성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해서 같이 실었다.”고 말했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탈피해 여성들끼리 만드는 ‘페미니즘 포르노’에 관한 프랑스 본지 기사도 실었다. “글로벌 네트워크끼리 콘텐츠를 공유하면서 프랑스판에 실렸던 기사를 본 한국 에디터들이 너무 좋아서 싣겠다고 요청해서 넣은 기사”다.

이런 경향은 최근 ‘미투’ 운동이나 페미니즘 이슈를 계기로 봇물 터지듯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해는 그동안 여성 패션 매거진들이여성 인권과 오히려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비난과 맥을 같이 한다. 박지현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는 “예전부터 ‘코스모폴리탄’은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2월호의 ‘미투’ 특집과 3월호의 생리 특집이 돋보였던 이유는 올해부터 스페셜 섹션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여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러브 섹션과 커리어 섹션, 컬처 섹션 등에 나뉘어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아예 스페셜 아이템 페이지를 마련해 독자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박지현 디렉터는 “임금 차별이나 직장 내 불합리한 상황들에 대해서도 이미 2년 전에 ‘여자는 왜’라는 제목으로 1년 넘게 다뤘다.”고 강조했다. ‘더블유 코리아’ 황선우 피처 디렉터는 “어떻게 꾸미느냐 꾸미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느냐의 문제라고 본다.”며 “그 결정에 대해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패션 매거진에서 다루고 소개하는 패션과 뷰티 영역은 많은 여성들이 종사하고 성취를 이루는 산업으로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패션 매거진을 만드는 여성 기획자들에게도 여전히 불편한 기사는 있다. “‘남자들이 싫어하는 패션 아이템’ 같은 기사”는 그도 좋아하지 않는다. 여성 패션 매거진들 안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방향과 흐름이 존재하며, 진통을 겪으면서 변화해나가는 시기다. 어쩌면 이것을 ‘진통’이라고 느끼는 것조차, 에디터들 스스로가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는 여성 에디터 개인에게 깨달음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마리끌레르’ 유선애 에디터는 “이번 25주년 기획 섭외 과정에서 거절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예전에는 유명한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멀리해야 할 요소처럼 여겨졌지만, 이번에는 재미있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진행이 수월한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여성이 여성의 편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에 관해 높아진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수요를 체감한 에디터들은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자신의 커리어가 맞닿는 지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고 있다. ‘더블유 코리아’ 황선우 피처 디렉터는 의류 브랜드 나이키와 함께 화보와 인터뷰, 영상 캠페인을 진행했을 때를 떠올린다. “다양한 여성들을 주체적이고 건강하게 비추는 데 대한 공감대를 공유하며 일했고, 그 과정이나 결과물에 나의 세계관을 타협 없이 반영할 수 있어 즐거웠다. 여성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통해 똑바로 해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엘르’의 김아름 피처 디렉터는 “지금까지 여성지에서 일했던 기간 중에 가장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 ‘엘르’를 통해서 내가 여성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의 인권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선입견을 갖기보다 기사 하나하나를 보고 비판해주면 고맙겠다.”는 황선우 디렉터의 말과 “연애를 하는 여자가 페미니즘과 대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과정에서 알아둬야 할 자기주도적인 시각이나 화법을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박지현 디렉터의 말에서, 페미니즘을 마주한 한국 여성들의 환호와 고민이 동시에 엿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여성들이 만들기 때문에 더 여성의 삶에 가까울 수밖에. 지금 한국의 여성 패션 매거진 제작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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