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포스트’, 기자가 하는 일

2018.03.08
지난해 이맘때 나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모태펀드 블랙리스트와 가짜뉴스를 취재하기 위해 역삼동 부림주택을 방문했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모태펀드라는 국가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자받아 화이트리스트 의혹을 받은 영화사가 가짜뉴스, 관제데모를 주도한 여러 보수단체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포털사이트 주소 검색을 통해 알게 되면서 그 사실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영화사와 가짜뉴스 그리고 여러 보수단체가 한 건물을 사용한다니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밝혀진 정보는 ‘한겨레21’과의 공동 취재를 통해 나비효과처럼 국정원 알파팀, 엔터팀 보도로 이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더 포스트’를 보면서, 사실이라는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기자들과 기사를 내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스크의 모습에서 그날 기억이 떠올랐다. ‘더 포스트’는 ‘워싱턴 포스트’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펜타곤 페이퍼는 닉슨 대통령 시절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지시해 작성된 기밀문서다.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에 이르는 미국 대통령 네 명이 재임 기간인 30년 동안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정부 의사 결정을 은폐해왔다는 사실이 이 문서에 기재됐다. 미국 국민을 포함한 전 세계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 계기가 통킹 만 사건(1964년 북 베트남 경비정이 미군 구축함을 먼저 공격한 사건-편집자)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문서가 공개되면서 통킹 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미국 국민을 기만한 펜타곤 페이퍼를 처음으로 입수해 세상에 알린 매체는 앞에서 언급한 ‘워싱턴 포스트’가 아니라 ‘뉴욕타임스’다. ‘뉴욕타임스’는 1971년 진실을 폭로했고 닉슨 정부는 이 보도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간주하고 후속 보도를 금지한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건 이 사건 취재에서 ‘뉴욕타임스’보다 한발 늦게 출발한 경쟁지 ‘워싱턴 포스트’의 취재기를 다룬다는 사실이다. 기자가 물을 먹으면 자존심이 구겨진다. 사건을 먼저 보도한 매체의 꽁무니만 쫓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물을 먹은 매체가 이슈를 따라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문서 작성을 지시한 로버트 맥나마라와 친한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 캐서린(메릴 스트립)에게 4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달라고 부탁하고, 기자를 시켜 문서가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게 하고, 회사 변호사를 불러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들을 자문받은 뒤, 다시 캐서린을 찾아가 기사를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을 먹은 편집국장과 기자들이 언론 본연의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서사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투자자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여성 발행인 캐서린이 신문사의 명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보도를 결정하기까지의 고민을 다룬다. 아버지와 남편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워싱턴 포스트’ 경영을 물려받게 된 그는 직원들의 근무 환경을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주들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기업 공개를 하기로 결정한 차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말할 수 없지만, “펜타곤 페이퍼 기사를 내보내야 한다”는 벤의 요구와 “기사가 나가게 되면 ‘뉴욕타임스’처럼 ‘워싱턴 포스트’ 또한 기소될 수 있고, 투자자가 등을 돌리게 될 수 있다”는 주주들의 주장 사이에서 망설이던 캐서린이 내리는 결정은 묵직하고 용감하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서 중요한 화두인 언론의 자유와 페미니즘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메시지는 꽤 의미심장하다. 2018년 한국 상황으로 좀 더 끌어들이자면, ‘더 포스트’는 언론인의 윤리와 태도를 다룬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보자 신원과 제보 내용을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제보자와 취재원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며, 취재원의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는 데다가 사건의 선정적인 부분만 부각시키고, ‘속보’나 ‘단독’을 남발하고 있는 최근의 ‘미투(MeToo)’ 기사들을 쓴 기자들이 꼭 봐야 할 영화다. 기사의 질은 속도가 아니라 기자의 윤리와 태도에서 출발한다. 40년도 더 지난 과거 이야기지만, ‘더 포스트’의 메시지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언론은 늘 옳지도 완벽하지도 않지만 뉴스는 권력이 아닌 시민을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목록

SPECIAL

image 마동석 영화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