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영화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2017.12.28
* 영화 1987’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987’은 현명한 영화다. 잊어선 안 될 역사를 스크린에 새겨 넣은 시대정신, 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메시지 자체도 충분히 박수받을 만하지만, 그 이전에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순수한 오락성과 오직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적 순간 또한 놓치지 않는다.

영화를 구상할 때만 해도 불가능한 기획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꼬리 물기를 하듯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플롯에,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 거의 매 시퀀스마다 바뀐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러한 구조를 고수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웅화된 특정 개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때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그러니까 점들이 모여 얼마나 강력한 직선이 되는가를 이야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명일 수 없다. ‘1987’은 계란으로 바위 치듯 골리앗에게 돌을 던지기 위해 사방에서 믿음으로 모여든 여러 다윗들을 내세운다.

모든 영화의 안타고니스트는 강력해야 마땅하다. 이 영화의 경우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일대다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심에 시대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박처장(김윤석)이 있다. 뒤틀린 신념에 매몰된 그는 난공불락의 영역처럼 보인다. 그래야 이 영화의 대결 구도가 무너지지 않는다. 장준환 감독은 박처장 캐릭터에 아우라를 더하기 위해 박해받는 예수(=교회 처마에 매달린 재야인사 김정남)와 박처장의 모습을 극명히 대비시킨다. 이렇게 악마화된 박처장의 얼굴은 다음 장면에서 전두환의 사진과 정확히 겹쳐진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박종철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최검사(하정우)가 부검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최검사가 들고 달리던 바통은 윤기자(이희준)에게 건네지고,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으로, 다시 그의 조카 연희(김태리)의 손으로 넘겨지며 영화는 릴레이하듯 달려간다. 겨우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영화에 이처럼 많은 인물이 등퇴장을 하면 자칫 영화가 산만하고 난해할 수 있다. 과연 방금 화면에 뛰어든 인물이 어떤 유형의 인간이며, 무엇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정보 등을 설명적 대사로 부연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면 필연처럼 영화는 느슨해지고 관객의 피로는 누적될 것이다.

하지만 ‘1987’은 이 난관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기존의 스타 이미지를 적확하게 활용한 캐스팅 전략 덕분이다. 하정우의 넉살, 이희준의 집요함, 김태리의 씩씩함, 설경구의 집념, 강동원의 무결함, 여진구의 순수 등 배우가 이미 갖고 있는 특정 이미지를 캐릭터에 씌워 관객에게 직관적 인상을 남긴다. 특히 유해진은 ‘택시운전사’에 이어 다시 한 번 1980년대의 평범한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극 중 이한열로 출연한 강동원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는 순간 ‘늑대의 유혹’의 우산 신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대거 출연은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른 효력을 발휘한다. 1987년의 시민, 대학생, 기자, 변호사, 의사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신념으로 제 목소리를 내었듯, 그 시대의 풍경을 재현하는 영화 ‘1987’의 배우들은 역할의 비중에 관계없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 다음 주자를 위해 조용히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수많은 인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빚어내는 가슴 뭉클한 드라마가 영화 안팎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1987’은 머리와 가슴을 적절히 오갈 줄 안다. 사건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동시에 분노를 점층시키는 방식으로 관객을 영화에 끌어당긴다. 박종철의 유가족이 경찰에게 억울하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넌지시 보여주더니, 부검을 지켜보다 눈물범벅이 된 박종철의 삼촌(조우진)의 얼굴을 지나, 박종철의 아버지(김종수)가 아들의 유골을 뿌리며 오열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관객의 심리적 거리가 비교적 먼 인물로 출발해 점차 더 가까운 인물들이 고초를 당하게 된다.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관객을 영화에 바싹 밀착시킨다. 이 영화의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반만 해도 카메라의 줌인과 이동은 다소 저돌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인물의 멱살이라도 쥐는 것처럼 급격히 인물에게 다가갔다가 뒤로 물러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인물의 절박한 심정과 상황의 위중함을 강화하는 장치다. 카메라 자체가 한 명의 배우처럼 배우들 사이에 섞여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이야기의 주자인 연희가 광장에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사건의 선명한 종결이나 통쾌한 승리의 쾌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연희는 버스 위에 올라가 어딘가를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인지 모른다. 아마 장준환 감독은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이 기시감의 풍경은 1987년과 2017년 사이의 간극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다.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제는 해묵다 못해 멋쩍게 느껴지는 이 질문을 ‘1987’은 다시 뜨겁게 던진다. 아니,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믿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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