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피겨스], 두 겹의 장벽을 넘어

2017.03.02

성과학자들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사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역사상 군대 다음으로 여성을 차별한 분야가 과학이라는 것이다. 19세기까지도 여성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성의 ‘말랑말랑한’ 두뇌는 수학과 과학의 엄밀함을 감당할 수 없으며 재생산에 초점이 맞춰진 여성의 신체 구조는 그 본성상 과학과 배치된다는 식의 주장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리 퀴리를 빼고 나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성 과학자의 이름을 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 인물은 드물었을 뿐더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으니까.

그런 과학 분야보다 여성의 진입이 더 힘들었던 것이 기술과 공학 분야이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들어서도 한참 동안, 지역과 분야에 따라서는 1960년대까지도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공과대학 대부분이 규정상, 혹은 사실상의 ‘남자 대학’이었다. (이러한 ‘남자 대학’들이 어떤 굴곡진 과정을 거쳐 ‘남녀공학 대학’으로 바뀌어 갔는가는 과학사가 에이미 수 빅스의 논문이 매혹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선입견은 오늘날까지도 강고하다. 생물학 분야를 중심으로 여성들에게 상대적으로 문호가 크게 개방된 과학과 달리, 공학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강하고 흔히 말하는 명문 대학들에서는 여성 공학 교수를 찾기가 여전히 짚단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 마고 리 셰털리의 책 [히든 피겨스](동아엠앤비, 2017)의 주인공들은 인종분리 정책이 여전히 강고하던 1940-50년대 미국 남부에서 활동한 ‘흑인’ ‘여성’ 수학자와 엔지니어들이다. 그들은 과학과 공학계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문화까지 두 겹의 장벽을 넘어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를 가능케 한 계기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뒤이은 냉전기의 체제 경쟁에서 주어졌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가용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고, 전쟁터로 빠져나간 남성들의 빈자리를 메우려면 ‘후방 전선’에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군수공장으로 개조된 자동차공장에서 탱크와 포탄을 생산하는 일명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가 되었고, 그 중 고등교육을 받고 수학에 재능이 있는 젊은 여자들은 전시의 다양한 필요를 충당하는 인간 ‘컴퓨터’로 일했다. 컴퓨터들은 군수공장을 막 빠져나온 신형 대포의 탄도를 계산하고, 독일군과 일본군의 암호를 풀고, (이 책에서 보듯) 항공기 설계에 쓰이는 풍동(wind tunnel)에서 나온 데이터를 계산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내주고 가정으로 물러나야 했지만, 꼭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 중 일부는 전쟁 이후에 새롭게 생겨난 냉전 특수(한국전쟁이 이에 크게 기여했다)로 인해 오히려 더 늘어난 직업적 기회를 갖게 되었고, 버지니아 주 랭글리 항공연구소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 컴퓨터들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여성이자 흑인으로서 이중의 고초를 겪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냉전 시기 미국의 국가 안보에, 더 나아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곧 개봉할 영화 [히든 피겨스]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한 도로시 본, 메리 잭슨, 캐서린 고블 존슨 등은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인들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만 한 점 가운데 하나는 전시와 그 이후에 여성들이 기울인 노력이 최근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잊혔는가 하는 것이다. 전쟁 시기에 그토록 상찬 받았던 여성 컴퓨터, 암호 해독가, 공장노동자들의 활동은 전쟁 이후 이른바 ‘정상으로의 회귀’ 과정에서 대중의 뇌리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소수 역사가들의 기록이나 나이든 생존자들이 들려주는 민간의 전승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셰털리는 NASA의 공식 역사가들조차도 어렴풋이만 알고 있던 여성 컴퓨터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5년여에 걸쳐 광범위한 생존자 및 가족 인터뷰를 수행하고 관련 자료를 발굴해 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 책(과 영화)이 거둔 놀라운 성공을 통해 보상받고 있다, 그리고 최근 다큐멘터리 [극비계획 로지 Top Secret Rosies](2010),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The Imigation Game](2014), 영국 BBC의 드라마 [블레츨리 서클 The Bletchley Circle](2012-2014) 등이 되살려 내고 있는 ‘가려진 (여성) 인물’들을 보면 앞으로도 그런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 그들이 더 이상 ‘가려진 인물’이 아니라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그날까지 말이다.


김명진
대학에서 20세기 과학사와 기술사를 강의하면서 관련된 책들을 쓰고 번역하는 일을 한다. [야누스의 과학] [할리우드 사이언스]를 썼고, [과학의 민중사] [과학을 뒤흔들다] [현대 미국의 기원]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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