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신사임당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2017.02.09
[사임당 빛의 일기]는 신사임당(박혜수/이영애)의 일대기를 다룬다. 우리가 알고 있던 현모양처인 신사임당과는 다르게 그는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이며, 당시 정치적인 비극과 맞물려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불운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현대에서 신사임당과 같은 외모를 가진 서지윤(이영애)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학문적인 열망을 인정받지 못한다. 역사 속 현모양처와 드라마 사이, 신사임당은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신사임당에 관한 이야기들.

안견의 [금강산도]는 얼마나 중요한 작품인가
신사임당은 이겸(양세종/송승헌)이 갖고 있던 안견의 [금강산도]를 보기 위해 담을 넘는다. [금강산도]는 이 둘이 연인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현대에서는 대학 시간강사 지윤이 [금강산도]가 진품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이 학자로서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견의 작품 중 [금강산도]는 없다. [금강산도]는 제작진이 장병언 화가에게 의뢰해 소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임당]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신사임당이 안견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의 [선비행장]에서는 신사임당이 일곱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를 보고 그의 화풍을 따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안견은 조선 초기 도화원의 화원으로 ‘안견파 화풍’이 생겼을 정도로 산수화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지지를 받았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시, 서, 화의 정수를 결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조선에서 안견의 그림은 산수화의 교과서 격인 작품이었다. 물론 안견의 작품은 손에 넣기 힘들었고, 어린 신사임당이 안견의 그림을 보고 그림을 배웠다는 것은 집안에서 신사임당의 교육에 힘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은 얼마나 뛰어난 화가였는가
“왜 여인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이리도 많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여인은 상소조차 올릴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하는 드라마 속의 신사임당은 아버지 신명화(최일화)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만 하기보다 직접 부딪혀 보고 느낀 바를 통해 배우고 익히고 싶어 한다. 실제로 신사임당의 모습은 알 길이 없다. 좋은 어머니로 알려진 신사임당이 7남매를 어떻게 교육했는지, 그의 교육 사상이 어땠는지 직접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사임당의 예술작품은 대부분 결혼 후 자녀를 낳고 기르는 기간에 쓰고 그려진 것이다. 그만큼 결혼 후에도 자신의 재능을 희생하지 않았고, 자식들이 이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신사임당은 시, 서, 체 모두 능통했는데, 이미 그가 살던 시대에 어숙권(서얼 출신으로 중국어에 뛰어나 외교에 이바지했으며 시 평론에 일가를 이루었다)은 [패관잡기]를 통해 신사임당이 포도화와 산수화를 잘 그려 그 이름이 높았고, 안견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시대의 시인 소세양 역시 신사임당의 산수화 족자에 붙인 시 말미에 “꽃다운 그 마음은 신과 함께 어울렸나니, 묘한 생각 맑은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 “알괘라 신묘한 붓 하늘 조화를 뺏었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 시대 때 여성의 예술적인 재능을 잡기 정도로 취급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신사임당은 정말 결혼을 급하게 했을까
[사임당]에서는 신사임당의 그림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아버지 또한 죽임을 당한다. 결국 이겸을 사랑하던 신사임당은 정치적인 문제로 결혼하지 못하고, 가난한 선비와 결혼을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이 일들이 하루 사이에 벌어진다. 이는 드라마에서 신사임당과 이겸 사이를 애절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원래 신사임당의 결혼은 절차대로 진행됐다. 신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했는데, 당시 서울에서 내려온 어떤 이가 “대궐에서 널리 처녀들을 뽑아 올린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딸을 가진 집에서 모두 중신아비 없이 사위를 맞았다. 이 때문에 양반 가문에서도 예식을 갖추지 못하고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홀로 모든 절차를 지키고 유유히 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선비행장]에 따르면 신명화는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질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라며 처가살이를 제안했다. 이원수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독자로 자라 학문이 그리 깊지 못했고, 집안도 가난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사윗감을 볼 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보기도 했지만, 뒤집어 보면 처가살이를 제안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고려의 풍습이 남아 있어 사위가 처가살이(남귀여가혼)를 많이 했었다고. 이에 대해 [사임당 평전], [사임당] 등 신사임당의 생애에 대해 해석한 책들에서는 “신명화가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도와주고 지지해줄 사윗감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신명화가 신사임당을 곁에 두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드라마 속에서 신사임당은 신명화가 죽은 뒤 3년 상을 치른다. 실제로 신사임당은 아버지의 3년 상을 치렀고,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다섯 명의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며 남긴 [이씨분재기]에 따르면 외손자 율곡에게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의 기와집 한 채와 노비 전답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딸의 남편이나 자손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인 외손봉사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도, 아버지 신명화도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살이를 했다. 16세기에는 아들과 딸이 재산 상속에 있어 차별되지 않았고, 여성의 재산은 혼인 후에도 남편의 집안으로 흡수되지 않고 자신의 재산으로 존속됐으며, 자녀 없이 죽는 경우 친정재산으로 환원됐다. 그래서 재산을 갖고 있던 여성들은 홀대받지 않았고, 그만큼 집안에서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두어 제사를 지내도록 한 제도는 17세기 이후에나 일반화된 일로, 17세기 중엽부터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 장자 상속권이 확립된 결과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임당]에서 이원수(노형욱/윤다훈)는 허름한 차림의 선비로 그려지는데, 드라마에서처럼 현실의 기록에서도 야심 없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율곡의 [선비행장]과 [겹첩록] 등에 따르면 이원수는 공부 때문에 신사임당의 애를 태웠다. 신사임당은 남편의 학문 공부를 건의하여 10년 별거를 약속하지만 그는 집에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반복했고, 신사임당이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을 해서야 겨우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10년을 하기로 했던 공부는 3년 만에 끝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후에 음서(고려·조선 시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관직 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특별 채용하는 제도)로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했다. [선비행장]에서는 이원수에 대해 “성품이 호탕하여 세간에 관심이 없었다. (생략) 아버지께서 어쩌다가 실수가 있으면 (어머니가) 반드시 간하였고” 등과 같이 기록한다.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 외조모 이씨 부인, 외조부 신명화 행장(죽은 사람의 행실을 간결하게 써서 그를 직접 보는 것처럼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글) 등을 모두 기록했는데, 유독 아버지 이원수에 대한 행장은 기록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율곡의 인식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왜 2017년에 신사임당인가
2007년 신사임당을 5만 원권 화폐의 주인공으로 선정했을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 적챙국장 김금옥은 “여성이 최초로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된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유가 현모양처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주체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현대 여성의 역할 모델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현모양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말로, 여성의 역할을 아내와 어머니로서만 규정짓고 그 역할을 통해 국가 근대화에 공헌하도록 만든 시대적 이데올로기가 담긴 말이다. 또한,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민족문화사업을 추진하며 신사임당에게 현모양처 이미지를 덧씌웠고, 이후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를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되며 국사, 국어, 미술 교과서에 시와 그림이 실린다. 초등학교와 여학교에 운동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신사임당 동상도 이때 세워진 것이었고, 신사임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에 투영,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육영수는 영부인 시절 언제나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소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육영재단을 설립해 어린이 회관을 건립하는 사업 등을 했다. 여학생들의 장래희망으로 ‘현모양처’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러나 현모양처의 삶은 신사임당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남편에게 언제나 바른 소리를 했고, 학문을 갈고닦기 위해 힘썼다. 지금 신사임당이 다시 이야기 되어야 할 이유다.

참고자료
[사임당] 임해리. 인문서원
[사임당 평전] 유정은. 리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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