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좋아요 vs 싫어요

2017.01.16
지난 주 영화 박스오피스 1위는 한국 영화도, 할리우드 영화도 아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었다. 일본에서 돌풍에 가까운 흥행을 한 [너의 이름은]은 한국에서도 지난 4일에 개봉해 누적 관객 240만 명을 넘겼다. 영화뿐 아니라 신카이 마코토가 쓴 라이트 노벨 [너의 이름은] 역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예스24 1월 2주차)를 차지했을 정도다. [너의 이름은]은 감독의 전작들보다 더욱 밝고 발랄한 분위기에 대중적인 요소를 섞으며 신카이 마코토가 감독으로서 한 걸음 성장했다는 평을 받지만, 한 편으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여러 장르적 특징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봉석 영화평론가와 이지혜 기자가 [너의 이름은]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한 이유다. [너의 이름은]에 대해, 각각의 시선으로 본 두 가지 입장.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의 힘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은 시에 가깝다. 순간의 느낌과 정서를 통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고,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언어의 정원]에서 아무 말 없이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공감하게 된다. 보이는 것만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단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와 [별의 목소리], 연작인 [초속 5센티미터]는 대단히 좋았다. 하지만 장편인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와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모험]은 늘어지고 덤덤해졌다. 흡인력이 없었다. 순간의 장면들은 좋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가슴이 확 딸려 들어가지만 그뿐이었다. 긴 시간 가슴 졸이거나 두근거리며 따라가야 하는 서사나 감정의 발전이 미미했다. 중편인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의 장점과 단점이 격렬하게 부딪친다. 전반부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후반으로 접어들면 순간을 공유하던 여자와 남자의 마음이 흩어져버린다. 겹쳐지는 그들의 마음이 보이기는커녕 너무나도 관습적으로 급하게 상황이 전개된다. 나만의 세계가 별다른 인과 없이 모든 세계의 운명으로 연결되는 ‘세카이계’가 흔히 그렇듯이.

하지만 [너의 이름은]은 다르다. 제작 단계에서 [너의 이름은]이 히트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작비는 4억 엔이고 지원금을 포함하여 만들어졌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스토리와 플롯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이하 지브리)의 느낌이 언뜻 풍긴 [별을 쫓는 아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신카이가 지브리를 따라가려고만 했다면 다시 실패했을 것이다. 신카이는 자신의 익숙한 세계에서 출발한다. 언제나 해왔던 이야기를 확장한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지금은 잊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간절하게 원하면 기적 같은 순간이 도래한다.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다. 자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희생자가 없다 해도, 일본인이라면 엄청난 충격과 슬픔이었다. 연애는 원하지 않아도 결혼을 원한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의지할 사람, 기억해줄 누군가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너의 이름은]은 1천 2백년마다 찾아오는 혜성으로 인한 재난을 보여준다. 혜성의 접근은 거대한 우주의 신비이고, 갈라진 꼬리의 일부가 지구로 떨어지는 모습은 인생에서 한 번 만나기 힘든 장관이다. 그날, 타키도 혜성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후, 끝없이 재난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도 누군가를 떠올리지 못했다.

기타노 다케시는 거대한 재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천 명의 희생자라고 하면 모른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면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비극인지 알게 된다. 그들의 인생 하나하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름은 단지 기호가 아니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에서, 세이메이는 존재 자체를 만들어내고 규정하는 ‘주(呪)’, 즉 이름에 대해 말한다. 김춘수의 [꽃]에도 나오듯 부르기 전에는, 의미를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미츠하도, 타키도, 너의 이름을 비로소 기억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 연결되어 있지만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신카이 마코토는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호소다 마모루로 이어지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로 치면, 이와이 슌지 같은 존재다. 원류가 다른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 장편들은 지브리 흉내를 낸 것 같았다.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본래의 세계다. 이전 단편들을 물론 학습지만이 아니라 건설회사, 부동산 회사 등의 CF에서도 지극히 유려하고 명료하게 그려냈던 세계를 장편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타키는 미츠하를 구하려 한다. 어떤 수를 써서든, 그녀가 씹어서 뱉어 만든 술을 마시고 황혼을 맞이한다. 낮과 밤이 교차하고,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서 타키는 세계가 아니라 미츠하를 구하려 한다. 나의 세계가 무너지면 세계가 멸망하는 거창한 꿈이 아니다. 미츠하가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타키의 세계는 더 이상 완전해질 수 없다. 가느다란 실로 맺어진 그녀와의 인연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종말이다. 나는 곧 세계야, 라는 중2병의 허세가 아니라 진짜, 간절하게 원하던, 나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마코토의 단편, 아니 세계가 집대성되어 있다. 단편이라면 더욱더 정제되고 치밀하게 구성되었겠지만, 장편이라면 다르다. 더 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보다 관습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신카이만의 아스라한 정서를 극사실주의적인 풍경으로 잡아낸다. 타키와 미츠하의 관계가 너무 급작스럽게 발전한다고? 하나의 몸을 공유했던, 생활의 경험을 함께했던 그들이 과연 한순간의 꿈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눈물을 흘리며 깨어난 꿈을 누군들 되찾고 싶지 않을까.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이 타인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너의 이름은]이다.
글. 김봉석(영화평론가)

피해자의 모에화
청춘을 상징하는 푸른 하늘. ‘시·공간을 넘어 육체가 뒤바뀐 소년과 소녀’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발랄한 목소리와 다채로운 표정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어느 여름 날, 소년과 소녀는 사랑에 빠진다. 신카이 마코토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분위기는 [별의 목소리], [언어의 정원], [초속 5센티미터] 등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별의 목소리]의 전장에서 배제된 소년은 소녀를 기다리기만 하고, [초속 5센티미터]의 장거리 연애를 하던 소년은 먼 길을 가 소녀를 만나지만 둘은 이어지지 못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가족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등 언제나 혼자만의 세계를 살아가곤 했다. 이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주절거리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카이계’의 특성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소녀와 소년의 연애가 세계의 존립에 영향을 미치는 세카이계에서 대부분의 주인공은 성공하지 못한다. 반면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 타키와 미츠하에게는 각자 친구들이 있고, 두 사람은 사랑에 성공한다.

[너의 이름은]은 여전히 주인공의 독백 위주로 흘러가는 세카이계 형식에, 영상은 종종 미소녀 게임처럼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며, 행복한 결말을 위해 몇 번이고 이야기를 반복하는 ‘루프물’의 특성까지 담았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이 장르적인 토대 위에서 절망과 좌절이 아닌 희망과 행복을 말한다. 세카이계에 속한 작품들은 대부분 주인공의 의식 바깥 세계를 좀처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너의 이름은]에는 주인공들이 살아갈 세계가 있고 더 나아가 이들은 그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타키는 미츠하가 사는 이토모리에 혜성이 떨어져 500여 명이 죽고 마을이 파괴되자 이를 막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다.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 큰 폭발 이후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마을 등의 이미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세카이계의 주인공이 세상에 개입하고 사랑을 구한다는 점에서, [너의 이름은]은 서브컬처의 언어로 만든 청춘물이자 현실 반영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은 서브컬처가 바깥 세계를 그리는 동시에, 바깥 세계를 서브컬처의 언어 안으로 끌어들인다. 신카이 마토코 역시 2011년 이후 [너의 이름은]을 기획했고, “(애니메이션이) 해피엔딩이 된 데에는 2011년 대지진이 큰 계기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마치 게임처럼 1인칭 쇼트로 소녀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것이고, 라이트노벨판 [너의 이름은]은 총 4부 중 1부가 ‘브래지어에 관한 고찰’을 통해 여성의 가슴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연상시키는 피해자가 시작부터 대상화 되는 셈이다. 이것은 [너의 이름은]이 미츠하를, 이토모리를, 더 나아가서는 후쿠시마를 다루는 시선이다. 미츠하는 무녀 집안에서 살며 고된 하루를 보내고, 학교에서는 웃음거리가 된다. 이 때문에 “이런 삶은 싫어! 다음 생에는 도쿄의 이케멘(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라며 소리를 지르고, 카페(이토모리에는 카페가 없다)라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다. 이런 미츠하를 도쿄의 남자 타키가 구하고, 미츠하를 살린 타임루프는 미츠하가 쌀을 씹은 뒤 뱉어 만든 술을 타키가 마시면서 가능했다. [너의 이름은]은 이를 ‘무스비’라는 자연과 미신적 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미츠하가 자연-지방-억압-소녀를 상징한다면, 그를 구원하는 것은 도쿄-도시-풍요-자유-소년이다.

소녀가 억압에서 탈출하는 길은 죽거나 도쿄의 남자를 만나는 것뿐이다. 세카이계는 이런 세계를 완성시키는 수단이다. 타키와 미츠하의 상황이 번갈아 묘사되던 [너의 이름은]은 미츠하가 죽음을 맞이하는 시점부터 타키의 시점으로 완전히 이동한다. 이후 타키는 미츠하와 이토모리를 잊지 않으려 하지만 꿈처럼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미츠하를 살리려는 타키의 입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의 아련한 마음이 부각된다. 소년이 소녀를 살리려는 이야기는 그렇게 도쿄 소년이 이토모리의 소녀에게, 사실상 도쿄를 비롯한 도시 사람들이 후쿠시마에 대해 가진 미안한 마음으로 확장된다. 구원받는 소녀의 입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미츠하가 시작부터 대상화됐던 것처럼, 타키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이토모리를 구하는 일을 했던 소녀의 노력은 삭제당하고 지워진다.

다시 말하면, [너의 이름은]은 소녀를, 지방을, 그리고 후쿠시마를 ‘모에화’한다. 미츠하가 마을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했었던 일들은 모두 지워지고, 살아난 소녀는 삶의 터전을 잃고 도쿄로 가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다 소년과 만난다.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들보다, 다른 세카이계 작품들보다 주인공의 세계를, 특히 소녀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담는다. 거기에 시대적인 함의도 담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소년과 도시의 미안한 마음을 해소하고, 국가적 트라우마를 모에화하면서 장르적인 재미를 충족시키는 데 소비된다.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세카이계를 비롯한 서브컬처의 세계를 넓혔다. 그 결과 대중적으로 더욱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장르들 속에서 대상화되던 존재들은 여전히 그들의 세계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너의 이름은]은, 정말 미츠하의, 소녀의, 후쿠시마의 이름을 정의하고 있는가.
글.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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