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와이프]│① 그녀의 이야기, 그녀들의 세계

2016.07.19
“나, 김혜경이야.” tvN [굿와이프]의 김혜경(전도연)은 매 순간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음에도 결혼과 함께 15년 동안 ‘이태준(유지태)의 아내’로만 살아온 그는 남편의 추락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전부 무너진 뒤에야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된다. 집도, 차도, 심지어 신문 정기구독까지도 모두 남편 명의로 되어 있던 김혜경의 삶에 남겨진 것은 막막한 생계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뿐이다. 과거의 그가 얼마나 뛰어난 법학도였는가, 얼마나 유능한 주부였는가는 무의미하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그러나 김혜경은 불안과 피로를 애써 삼키며 그 전까지 남편의 것, 남자들의 영역이었던 세계로 뛰어든다. 그리고 “평생을 안전하게” 살았던 그는 선언한다. “더는 그러기 싫다.” 

알려진 대로, [굿와이프]는 2009년부터 올해 5월까지 7시즌에 걸쳐 방영된 미국 CBS의 동명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의 첫 회에서 주인공 알리샤(줄리아나 마굴리스)의 상사 다이앤(크리스틴 바란스키)이 알리샤에게 힐러리 클린턴의 사진을 가리키며 “저 여자도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겠죠”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명인 남편의 성 추문에 덩달아 휘말리는 아내는 드라마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굿와이프] 방영 1년 전, 뉴욕 주검사장 출신의 주지사 엘리엇 스피처는 재임 중 성매매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변호사인 아내 실다 스피처는 드라마의 첫 장면처럼 남편의 사임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와 마주했다. 작가이자 프로듀서인 미쉘 킹과 로버트 킹 부부는 이처럼 낯설지 않은 ‘그의 스캔들’로부터 ‘그녀의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알리샤 플로릭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가 탄생했다. 모범적인 이미지 때문에 ‘성녀 알리샤’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러나 점차 자신의 욕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기기 위해 교묘한 수를 쓰기도 하는 알리샤는 기존의 드라마 속 여성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타입의 주인공이었다. 성녀도 악녀도 아닌, 모성애와 연정 사이에서 ‘택일’하거나 과도하게 죄책감 느끼지 않는, 눈앞의 현실을 살아가는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타임]은 “다른 드라마 작가들이 여주인공을 ‘호감 가게’ 만들기 위해 초조해한 반면, 이 쇼는 우리가 알리샤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게도 만들었다”면서 “[굿와이프]는 현대적 페미니즘을 혁명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분석했다. 

2016년 한국에서 [굿와이프]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전도연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그 후 인터뷰에서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온통 40대 ‘아재파탈’을 칭송하지만 40대 여성 배우에게는 기회가 충분하지 않다. ‘여배우’는 종종 ‘(진짜) 배우’의 하위 개념처럼 취급되고, 연기력과 무관하게 단지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관록 있고 강한 여성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그에 걸맞은 배우들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김혜경은 남편의 과오로 인해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고 모욕당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품위를 잃지 않으며 파워게임의 한복판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맞춰 나가는 인물이다. 김혜경과 그가 일하는 로펌의 대표 서명희(김서형), 조사원 김단(나나) 사이에는 이유 없는 적대감이나 갑작스런 친밀함이 피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여성들은 직업적 영역에서 공동의 성취를 위해 서로를 비판하거나 지지하며 연대한다. 외도로 집 나갔던 남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썼거나 강간 피해자임에도 ‘꽃뱀’으로 취급받는 여성 등 법의 사각지대에 있던 의뢰인들을 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전문가로서 이들의 능력이다. 그리고 이처럼 공적 관계의 여성들을 손쉽게 질투, 열등감, 삼각관계 등의 덫에 밀어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이 단순히 선의나 인정에 이끌리게 만들지도 않은 덕분에 [굿와이프]는 기존의 드라마들과 다르면서도 풍부한 결을 지닌 드라마가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 [굿와이프]가 보여준 대부분의 미덕은 원작에 빚진 바가 크다. 인상적인 대사, 인물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법정에서의 결정적 장면 등은 거의 번안에 가까운 수준이다. 원작에서 동등한 파트너이자 라이벌로서 긴장감을 유지했던 다이앤과 윌(조쉬 찰스)의 관계가 서명희-서중원(윤계상)의 남매로 바뀌며 가족사가 강화되거나 이태준을 둘러싼 음모의 비중이 커지면서 탄탄한 법정 드라마이자 여성 중심 드라마로서의 미덕은 희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대 한국이라는 배경 안에서, 강간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거액의 합의금을 제시하는 가해자에 대해 “그럼 왜 돈을 주죠? 죄가 없는데?”라는 피해자의 질문이 충분히 유의미한 것처럼, [굿와이프]는 지금까지 여기에서 이루어져 온 논의를 넘어, 한 발 앞서 나아간 사회의 정서와 서사를 이식해 옴으로써 보다 진보한 드라마의 상을 제시한다. 김혜경은 자신에 대해 “법정에 그냥 꽃처럼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던 서재문(윤주상) 앞에서 자신이 ‘꽃’이 아님을 증명한다. 여성은 악인이 아니어도 냉철할 수 있고, 정의를 추구하는 동시에 야심가일 수 있고, 남성이 아닌 상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도 있고, 자신을 배신한 남편을 향해 “사랑하고, 또한 증오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성은,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굿와이프] 원작은 이 당연한 가능성에 힘을 실음으로써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15년 전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올해 백악관의 새 주인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계속 바뀌어간다. 

지난 5월, [LA 타임즈]는 “[굿와이프]는 어떻게 TV의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했는가”라는 칼럼을 통해 [하우스 오브 카드]나 [제시카 존스], [하우 투 겟 어웨이 위드 머더] 등 경계를 넓혀 나가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다수의 드라마들이 [굿와이프]에 빚을 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칼럼은 “결국, 모든 르네상스에는 모나리자가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우리에게도, 더 많은 모나리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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