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해월리 산책], 너와 나의 사이

2016.07.15
[해월리 산책]은 두 주인공이 해월리를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를 담은 짧은 만화다. 큰 인쇄물을 세 번 접어 만들었다. 나누어진 형태로 볼 때 4쪽의 만화면서, 펼쳐진 모양으로 볼 때 낱장의 것이다. 포스터라기에는 최소한의 페이지를 가지려 하고, 책이라기에는 커다란 낱장이려 한다. 흔한 분류 어디에 넣어도 조금씩 엇나간다.

지난 주말(7월 9~10일) 아트소향에서 열린 [부산 아트 북 페어]에서 처음 보고 바로 구매했다. 책을 판매하는 방식 역시 독특했는데, 그대로 가져가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며 즉석에서 표지의 지도 핀에 색을 칠해주고 지도상 어떤 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지 붉은 펜으로 그 영역을 표시해주었다. 먹1도로 인쇄된 표지에 갑자기 색이 칠해질 때 그저 배경처럼 보이던 해월리가 구체적인 어디에서 어디까지 길이 된다. 표지를 채우기 위한 그래픽이 북 페어 현장에서 비로소 실체를 가진 장소가 된다. “이거 한 권 주세요”와 “얼마입니다”라는 팔고 사는 순간 사이에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게 아직 끝난 게 아니라…”가 개입한다. 판매자가 표지를 ‘끝’내는 장면을 바라봤다. 만든 사람에게 끝이 나면 읽는 사람에게 시작되는데 그 경계에 잠깐 서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아는 형을 만나 길지 않은 길을 걷는 내용 자체에 유별난 점이 없지만 작가는 그 속에 ‘평범한 일상’과 다른 지점들을 유머러스하고 치밀하게 짜 넣었다. 그들은 산책의 사이사이 발견하는 장면에 서로 좋아하는 영화를 끊임없이 대입한다. 거리에서 마주친 아저씨를 보고 [파고]를 떠올린 뒤 대화를 [인사이드 르윈]으로 끌어가거나, 틸다 스윈튼을 닮은 고양이를 ‘틸다’라고 부르며 반가워한다. 홍상수의 영화 제목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틀리고 그때도 틀리다]라고 계속 혼동하면서 “제목 좋아. 뭔진 몰라도….” 귀엽게 넘기는 컷도 앞서 [파고]를 거론한 덕에 더 효과적으로 이어지며 쓰였다.

49개의 컷으로 완결되는 만화 [해월리 산책]을 보면서 이들의 대화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이 사람과 어떤 취향과 작품을 공유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어 앞뒤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쌓인 시간이 길거나 부연하지 않은 암호를 단번에 해독해내 그것을 또 다른 동력으로 쓰는 대화. 산울림의 노래만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채거나, 홍상수의 영화에 별점을 많이 준 이동진이 누구인지 이미 잘 알거나, [주토피아]를 본 사람들이 싫어할 팬아트에 대해 말하거나, 길고양이를 틸다라고 부르거나, 그 고양이의 행동을 틸다 스윈튼이 출연했던 영화에 빗대어 설명하는 산책과 대화를 독자에게도 주석 없이 부연 없이 펼쳐 보인다. 두 인물 사이의 은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은어로 다시 쓰인다. 지나치게 큰 [해월리 산책]의 판형과 제목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잠깐 숨기고 펼치자마자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데 유용했다.

갑작스레 고백하자면 업무 미팅 같은 자리에서 상대가 “유명한 작가 누구누구”를 이야기했을 때 마주 바라보는 눈동자를 피해 사선으로 저 멀리 초점을 풀면서 “아아, 알죠”라고 한 적이 많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다시 반복할 때마다 이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모르는 어휘와 이름과 작품과 표현을 모른다고 편히 밝힐 수 있는 관계는 각자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닐까. 지적 체면 차리기용 게임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끼리 더 밀도 있게 연결된다. 우리의 대화에 더 많은 약어와 암호가 농담부터 토론까지 그 사이사이 더 자주 쓰이길 바란다.

이로
엉망진창입니다. 무명의 쓰는 사람. 책방 유어마인드와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운영합니다. [책등에 베이다](이봄)를 썼고 아직 이것이 그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책을 쓰고 있습니다.



목록

SPECIAL

image 워너원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