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롯기’│① ‘엘롯기’는 사랑입니까?

2016.07.12
2016 프로야구 시즌엔 성층권이 존재한다. 1위 두산 베어스(이하 두산)부터 4위 SK 와이번스(이하 SK)까지로 이루어진 이 권역은 6월 중순부터 아무런 변동 없이 순탄하게 4위까지 보장된 가을 야구를 향해 행진 중이다. 서로 간의 순위 침범도 없다. 기상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쾌청한 성층권이다. 혼탁한 건 그 밑의 대류권이다. 현재 5~7위를 형성 중인 롯데 자이언츠(이하 롯데), KIA 타이거즈(이하 KIA), LG 트윈스(이하 LG)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가을 야구를 향한 마지막 입석 티켓인 5위 경쟁을 하는 중이다. 익숙한 묶음이다. 프로야구 팬들에게 언제나 ‘엘롯기 엘롯기 신나는 노래’였던 ‘엘롯기(LG, 롯데, KIA)’ 동맹이다. 한동안 이합집산 하다가 지난 시즌 서로 사이좋게 7, 8, 9위를 기록하며 오래된 우정을 확인한 이들 동맹은 미처 그 위로 올라가진 못하고 서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비와 우레를 뿌리며 대류권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엘롯기’의 5위 경쟁은 우연이다. 삼성 라이온즈(이하 삼성)이 심각한 전력 누수로 이렇게 침몰하지만 않았더라면 앞서의 성층권은 1~5위까지 형성되어 나머지 다섯 팀을 온전히 소외시켰을 것이다. 삼성과 한화 이글스(이하 한화)의 추락은 이번 시즌의 가장 큰 변수다. 상수가 있다면 한 구역에 묶일 수밖에 없는 ‘엘롯기’의 고만고만한 실력 차다. 즉 지난해 7~9위로 묶인 ‘엘롯기’ 권역 밑에 삼성과 한화 이글스가 들어와 반대급부로 ‘엘롯기’ 권역이 5~7위에 형성됐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상수와 변수가 더해져 지금 ‘엘롯기’가 만들어가는 대류권의 풍경은 수준은 낮되 치열하고, 플레이는 단조롭지만 게임은 다이내믹하다. 지난 6월 30일 KIA와 LG의 경기를 떠올려보라. 2회에만 9점을 몰아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던 KIA는 끝끝내 그 9를 두 자릿수로 바꾸지 못하더니 결국 4점 앞선 9회에 동점을 허용하고 11회에 지고야 말았다. 대역전극이라는 표현은 자칫 명승부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한 이닝에 9점을 내준 LG도, 4점 차 리드에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놓고 그걸 지키지 못해 진 KIA도 엉망진창이었다. 혈전이라고 명승부가 아니다. 단지 막싸움이 벌어졌고, 둘 다 쌍코피가 터졌을 뿐이다. 그리고 팬들의 속도 터졌다.

프로야구 10개 구단 안에서 ‘엘롯기’ 팬덤이 유독 크며 자학적이라는 건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스포츠 팬덤이란 근본적으로 ‘잘하는 편 우리 편’의 심플하고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다. 인기와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다만 ‘엘롯기’에 있어 인기와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비례한다. 이 비대칭을 견뎌내는 건 고스란히 팬의 몫이다. ‘엘롯기’의 상징성은 이 비대칭성에 있다. 이번 시즌이 더 나쁜 건, 삼성, 한화, KT 위즈의 동반 부진과 함께 5위 가능성이 가시화되면서 희망 고문까지 더해진다는 것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굳이 성층권 4개 팀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현재 ‘엘롯기’는 가을 야구에 어울리는 팀들이 아니다. 승률 4할대라는 건, 야구를 보며 환호하는 날보다 욕하는 날이 더 많다는 뜻이다. ‘엘롯기’ 팬이란 그것을 감내하고 욕하고 응원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떤 야구팬도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라는 유혹을 외면할 만큼 의연할 수는 없다. 심지어 서로의 경쟁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비슷한 수준의 ‘엘롯기’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라는 학습된 자조 속에서도 쟤들이 상대라면 혹시 모른다는 기대가 공존한다. ‘엘롯기’가 벌이는 5위 경쟁의 혼돈만큼, 팬들의 마음도 격랑을 일으킨다. 지옥은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이 지옥의 풍경은 앞서 말했듯 비장하기보단 저질에다 심지어 종종 코믹하다. 당장 ‘엘 꼴라시코’라는 말로 희화화되는 LG와 롯데의 라이벌 대결은 4월 12일 첫 경기부터 양 팀 총 14명의 투수가 등판하고 10회까지 가서야 끝이 났다. 이런 경기에선 끝까지 본 사람이 패배자다. 경기 승패와 상관없이 항상 패배하는 건 팬들이다. 그럼에도 비극보단 희극에 가까운 풍경 앞에서 자기연민이나 비애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경험하는 지옥의 크기와는 별개로 ‘엘롯기’ 팬들은 대외적으로도 스스로도, 망국의 서글픈 난민이 아닌 저질 코미디의 고정 관객이자 참가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저 조악한 야구 안에서도 어떻게든 승수를 쌓아 5위에 근접하길 바라며. 잘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잘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기대를 품는 이 기묘한 마음은 사랑이란 감정의 가장 지랄 맞은 면모다.

이번 시즌 ‘엘롯기’는 팬들의 바람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이것은 ‘엘롯기’의 야구가 실망스러우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시즌 전반기가 증명하듯, 실망은 기본값이다. 사랑이 빌어먹을 감정인 건, 실망을 전제하고서도 타협 가능한 희망의 하한선을 새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탈(脫) ‘엘롯기’가 불가능하다면 그 안에서라도 1등을 하길 바라는 마음, 준플레이오프 진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는 오르길 바라는 마음, 상위팀과의 3연전 위닝시리즈는 바라지도 않으니 스윕이라도 안 당하길 바라는 마음 같은 것들. 남들이 보면 우스꽝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5위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면에선 5위라는 타협점이 더 뒤로 밀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가깝다. 이 하한선은 후반기가 되어서도 유지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단지 너무 멀리 보기보단 가끔씩 허용되는 사소한 기쁨을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대체 무슨 맛으로 야구를 보겠나. 그러니 우선은 몇 년 만에 ‘엘롯기’가 삼성보다 위에 있는 순위표라도 캡처해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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