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코니 윌리스 믿으세요

2016.06.22
여왕마저도 절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가 국내에서 절판된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강 건너 불구경 같았던 장르 문학 팬들의 고통도 그제야 와 닿았다. 절판 앞에 그랜드 마스터 없구나. 쓰린 깨달음 이후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틈만 나면 아무나 붙잡고 코니 윌리스 믿으시라고 외쳐대기 시작한 것이다. SF를 좋아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작가라고 덧붙이면서. 전자는 진실이다. 코니 윌리스는 믿어도 된다. 하지만 후자는 너무 심한 생략이었다. 절판으로 받은 충격 때문에 다급하게 팔아보려다 그만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해버렸다.

코니 윌리스가 SF 초보들이 접근하기 쉬운 작품들‘도’ 쓴 건 맞다. 그러나 그를 ‘쉬운 SF’ 전문 작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약 50년의 세월 동안 코니 윌리스는 정말이지 모든 걸 다 썼기 때문이다. 시간여행부터 양자물리학, 종교와 복제인간까지 때로는 어렵게, 때로는 쉽게, 그리고 언제나 훌륭하게. 수상 경력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휴고상이 열한 번, 네뷸러상이 일곱 번에 2011년에는 그랜드 마스터 상도 추가되었다. 이 상들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찾아보기는 귀찮다면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코니 윌리스는 평단과 독자는 물론 동료들로부터도 골고루 인정받는 SF 마스터 중의 한 명이라고.

수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있지만 대표작은 역시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다. 코니 윌리스는 근 미래의 옥스퍼드 시간여행학과 학생들이 과거를 여행한다는 설정을 단편 [화재 감시원]에서 처음 소개한 후, 긴 연구에 임하는 과학자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테스트하며 발전시켰다. [화재 감시원]의 바솔로뮤는 나치 공습으로부터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켜내려다 시간여행자의 금기를 어기며 과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그의 룸메이트인 키브린도 [둠즈데이 북]에서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에 잘못 떨어진 탓에 관찰자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주인공인 네드와 베리티도 마찬가지.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에서 고군분투하다가 기존의 시간여행 가설과는 달리 과거의 물건이나 생명체를 현대로 옮겨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꾸준히 수정·보완되어오던 시간여행 이론은 완결편이라고 볼 수 있는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 와서는 매혹적이게도, 뒤집힌다. 서로 다른 시대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사용된 작가의 지식은 방대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인 휴머니즘은 감동적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주인공들도 너무나 선량하고 용감해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늘 코니 윌리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인 ‘재미있고 다정한 수다쟁이 할머니’(남성 작가였어도 과연 이런 식으로 묘사될지 가끔 궁금해지는데)를 액면 그대로 믿었다가는 처음 접하는 독자는 당황할지도. 그의 시간여행 이론은 작품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만 독자에게 떠먹여주는 식은 아니며,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점차 복잡하게 진화하므로 대충 읽었다가는 따라잡기 힘들다. 게다가 코니 윌리스는 자신의 인물들을 사랑하지만 감상적으로 다루진 않기에 마냥 안심하고 읽을 수도 없다. 시간여행은 몹시 위험한 전공이다!

단편들을 봐도 그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부담 없는 이야기만 쓰려는 작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생리가 ‘축복’이니 ‘특권’이니 하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여왕마저도], 치열하게 진실을 쫓았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H. L. 멘켄의 영혼이 현대 미국으로 돌아와 협잡꾼들의 사기 행각을 폭로한다는 설정의 [인사이드 잡]은 장르 문학의 장치를 빌려 현실을 꼬집는 흥겨운 풍자 소설이다. 또한 [여왕마저도]의 후기에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비난을 받고 이 작품을 썼다고 능청을 떨고 있지만, 코니 윌리스는 그 전에 이미 단편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폭력을 직설적인 어조로 비판한 적이 있다.

다행히도 2016년은 코니 윌리스 부활의 해가 되려는 모양이다. 훌륭한 장르 문학들을 발 빠르게 소개하고 있는 출판사 아작은 두 권의 단편집을 시작으로 최근 [양 목에 방울달기]를 국내 최초로 출간했다. [둠스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복간과 함께 [블랙아웃], [올 클리어]의 번역 역시 계획 중이라고 하니,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 맞았다. 나의 기도는 응답받았으니 이제는 불타는 눈을 한 새로운 신도들의 출현을 기다려본다. 한 번 절판은 안타깝지만 두 번 절판은 비극이다. 그러니 선생님, 코니 윌리스 믿으세요. 믿으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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