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피해자가 미국 사회에 보낸 편지

2016.06.15
대학 캠퍼스에서 의식을 잃은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이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최대 14년까지도 받을 수 있었던 형량이 비약적으로 줄어든 건 긴 투옥 생활이 남자의 인생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판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강간을 저지른 남자가 촉망받는 수영 선수에 일류 대학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강간이라는 중범죄에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것은 종종 한국 사회에서도 보게 되는 뉴스지만, 이번 일은 미국의 이야기다. 자칫 그냥 묻힐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피해자가 법정에서 가해자에게 편지 형식으로 진술한 내용을 [버즈피드]가 그대로 기사화하면서 주목받았다. 편지의 전문이 기록된 해당 기사는 원고를 작성하는 현재 1,400만 조회수를 달성하며, 미국에서 성폭행 문제에 관한 여러 논의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호소력 있는 피해자의 편지는 강간 사건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켰고,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분노를 촉발했다. 특히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가해자인 브록 터너의 아버지가 쓴 편지다. [가디언]은 터너의 아버지가 법정에서 감형을 탄원하며, “20분간의 행동”으로 너무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을 기사화했다. 두 편지는 강간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극명하게 대조시켰다. 강간 사건의 피해자는 삶이 망가져 버리지만, 가해자는 자신의 강간 행위를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분노는 담당 판사에 대한 해임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뉴욕 타임스]는 Change.org에서 이루어지는 해임 청원과 논란이 되는 내용, 담당 판사인 애런 퍼스키의 평판에 대한 얘기를 보도했다. [슬레이트]에서 하나의 판결을 두고 이루어지는 해임 청원은 사법권의 독립성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을 하기는 했지만, 목표치인 100만 서명이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대중의 분노는 이번 판결이 이례적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브록 터너의 형량이 흔치 않은 일이라며, 강간 사건의 판결에 관한 국가적인 통계치를 들어 왜 판결이 부적절한지를 설명하고, 어처구니없이 낮은 처벌을 받은 비슷한 사례들을 소개했다. 한편, [복스]는 국선 변호사의 외부 기고를 통해, 애런 퍼스키 판사가 가해자와 같은 상류층 백인, 같은 스탠포드 대학교 출신이라 편향성을 보인 것이고, 만약 저소득층 흑인이었다면 더 많은 형량이 나왔을 것이라며, 애런 퍼스키를 비판하고 사법 시스템이 특권에 대한 편향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글을 올렸다.

강간 사건을 다루는 언론계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처음 보도된 가해자의 사진은 학교 앨범에 있는 잘 나온 사진이었는데, 강간범을 미화할 여지가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보잉보잉]은 처음에 머그샷을 쓰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체포 당시의 사진을 기사에 첨부했다. 또한 [살롱]은 “피해자 또한 꿈과 미래가 있었다”며 가해자를 동정하고, 가해자의 꿈과 미래에 대해 얘기했던 기사들을 비판했다. 그런 동정이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를 지워버리고, 가해자에게 유리한 맥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사건이 있던 날 밤 피해자를 구해준 자전거를 탄 두 명의 스웨덴 학생도 기사화됐다. 피해자는 편지에서 “이 이야기에 영웅이 있다는 걸 상기하기 위해 침대 머리맡에 제가 그린 두 대의 자전거 그림을 붙여두고 잔다”고 말했다. [버즈피드]는 두 사람이 누군지 보도하고, “편지를 읽고 감동받았다”라는 그들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피해자의 편지에 감동받은 사람은 그 둘만이 아니다. 미국의 부통령 조 바이든은 피해자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당신에게 일어난 일과 스스로를 변호하게 만든 우리의 문화” 때문에 화가 나지만, 피해자의 행동이 “사람들을 구할 것”이라 말했다.

브록 터너는 자신의 범죄가 “파티 문화”와 “음주”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다. 조 바이든은 “동의 없는 섹스는 강간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강간은 범죄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이 전제를 가해자 측은 무시하고 있다. 비단 이번 사건만이 아니다. 강간 사건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서사에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술이 변명이 되는 건 다반사고, “챙겨주려 했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기도 한다. 이번 사건이 호소력을 갖는 건 사람들이 피해자의 시선에서 생생하게 그녀가 겪은 고통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KTVU]에 보낸 성명에서 “지금 저는 모든 여성입니다”라고 말하며 익명 속에서 계속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맞다. 이 문제는 단순한 개별 사건이 아니라, 모든 여성의 문제다. 그녀가 편지에서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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