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팟캐스트, 더 많은 목소리의 더 많은 이야기

2016.06.16
“같이 TV볼 때 여자들이 안 나오면 가차 없이 채널을 돌린다. 언니들끼리 나와서 좋아하는 방송이나 프로그램이 너무 없어서 저희가 만들었다. 더 많은 여자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지난 2월 첫 방송된 팟캐스트 [레즈문화방송] 오프닝에서 진행자 정레즈와 박레즈는 방송을 만들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살아오다 보니 아이돌 팬덤 문화와 멜로드라마 등 다수의 여성들이 공유하는 취향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두 사람은 레즈비언 입장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데 아쉬움을 토로하며 말했다. “매일 여자 커플이 나오면 우리도 TV를 끼고 살 것 같아요.” [레즈문화방송]은 3월 22일 3회 방송분을 마지막으로 현재 업로드가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12년 전,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들의 드라마 [L 워드]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알리스(레이샤 헤일리)가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이 속한 레즈비언 신의 소식과 가십 등을 전하는 모습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레즈비언 라디오 방송의 역사는 짧지 않다. ‘레주파’가 만드는 마포 FM [L 양장점]은 2005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방송 중이고,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도 인터넷 라디오 방송은 활성화된 편이다. 음성만으로 방송이 가능해 아우팅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고 제작비 역시 비교적 적게 드는 팟캐스트의 대중화는 최근 2, 3년 사이 더 많은 성소수자들의 참여를 불러왔다. 2014년부터 인기를 모은 [별일 없이 산다]는 현재 시즌 2 스핀오프 격인 사주상담 ‘별거 없다’와 영화 토크 ‘L 스타일’을 방송하고 있으며, 여성 성소수자 영화 모임 ‘씨네마의 노예들’도 지난해 7월부터 [씨노온더레코드]를 방송한다. [벽장 안 여자 이야기]나 [특별한 이야기]처럼 한 명의 진행자가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정체성이나 커밍아웃, 레즈비언 관련 용어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지난 4월 방송을 시작한 [L 살롱]은 취향과 성격이 상반된 두 진행자 피북과 루푸의 뚜렷한 캐릭터가 만담 같은 재미를 주는 토크쇼다. 정체성, 연애, 섹스에 대한 고민 상담은 물론 최근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동성결혼 합법화 소송에 대한 판결 등 성소수자 관련 정치 사회적 이슈를 파고들기도 하고,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추모 집회가 열린 5월 22일에는 현장에서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 레즈비언 신의 콘텐츠 부족과 롤 모델 부재에 아쉬워하던 중 “뭔가 재밌는 걸 하며 다 같이 즐겁게 놀아보고 싶은 마음”(루푸)과 “진행하면서 공부도 좀 하고 자신을 정체화하는 계기로 삼으려”(피북) [L 살롱]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이들은 방송 뿐 아니라 영화 상영 등 오프라인 이벤트도 지속적으로 주최하면서 좀 더 적극적인 구심점의 역할을 하려는 편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레즈비언이면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좋은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그들에게 [L 살롱]이 특히 어떤 청취자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한국 여성 수명이 100세를 넘어가는데, 레즈비언 신의 다수는 20대다. 30~40대도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나라에서 레즈비언으로 70년을 더 살아야 하니까 어딘가에 있을 ‘언니들’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지원하고 싶다. 이성애자 부부들이 저녁 먹으면서 지상파 뉴스 보는 것처럼, 레즈비언 부부들이 월요일 출근길 차 안에서 우리 방송을 들으면 좋겠다.”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비온 뒤 무지개 재단의 새싹공간기금지원을 받아 예술 콜렉티브 ‘사행성’이 제작하는 [레죠]는 독특한 구성과 콘셉트를 지닌 프로그램이다. ‘사행성’의 일원이자 친한 친구 사이인 레즈비언 서섬과 헤테로 후죠시(남성들의 동성애를 그린 소설이나 만화 등 BL 콘텐츠를 좋아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속어) 박하다는 각자가 속해 있는 집단으로부터 좀 더 넓게, 바깥을 향해 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레죠]를 만들었다. “서로 관심 없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레즈비언과 후죠시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문화라는 점, 소수라는 것, 외부와 차단되고자 하는 방공호 정서가 있다는 점 등 겹치는 구석이 많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동료가 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았다. 성정체성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서섬) 그래서 아이돌 팬덤과 팬픽 이반 등 레즈비언-후죠시 문화의 교집합을 분석하거나 유명 팬픽의 한 대목을 낭독하기도 하는 [레죠]가 앞으로 다룰 아이템들은 역할극, 개인 봇, 동인지 자기검열의 역사 등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동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레즈비언 혹은 바이섹슈얼 후죠시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런 분들이 호모포비아적인 면을 보여줄 때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박하다) 레즈비언, 후죠시, 레즈비언인 후죠시, 그중에서도 특히 십대 청소년들이 [레죠]를 들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반면 딱 부러지는 독특한 말투와 또렷한 발성이 인상적인 [라이트: lite]의 진행자 기무상은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많이 듣기를 바란다. 레즈비언이 얼마나 평범한지를 알면 좋겠다. 정체성 혼란을 겪던 청소년 시절, 만약 그때 레즈비언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줬다면 제 인생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30대 초반의 영어 강사인 그는 2012년부터 3년에 걸쳐 영어 관련 팟캐스트 방송을 했고, 지난 해 10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이 목소리를 듣고 있는 당신을 위해서”라는 멘트와 함께 [라이트: lite]를 시작했다. 기무상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직접 노래를 커버해 부르기도 하며 다양한 연령대와 환경에 놓인 레즈비언들의 인터뷰도 자주 진행되는 [라이트: lite]는 유튜브에도 업로드 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영상도 함께 제공된다. 기무상은 “팟캐스트와 달리 전 세계적으로 개방된 유튜브에서는 이유 없는 혐오와 비방 댓글이 5~10% 정도를 차지한다. 이 콘텐츠를 보고 듣는 사람 중에는 성소수자도 있지만, 성소수자가 궁금한 사람들, 성소수자를 응원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 목적은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레즈비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많은 유튜브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고정 구독자는 3천 5백 명 가량이다.

한국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자 성소수자인 레즈비언들의 가시화나 세력화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러나 2014년 서울시 인권헌장 폐기에 반발한 시청 점거 농성이나 해를 거듭하며 점점 규모를 키워가고 있는 퀴어문화축제 등 퀴어들의 사회적·정치적 참여 욕구는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시민운동을 학습하지 않은 세대에게 다소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운동 단체나 기존의 폐쇄적 성격을 띤 온라인 커뮤니티에 미처 다 흡수되지 못한 에너지들은 새로운 채널을 통해 개인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나이 든, 어린, 안과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다. 어쩌면 그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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