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리 “[아가씨]의 숙희는 사랑이 무엇으로부터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

2016.06.07
영화 [아가씨] 숙희(김태리)의 닮은꼴은 어떤 사람보다는 생쥐나 길고양이 같은 동물에 가깝다. 거대한 저택을 잽싸게 누비며 눈치를 살피고, 귀족 아가씨보다도 보석을 잘 구분할 만큼 도둑 경험에서 쌓인 남다른 눈썰미도 있고, 히데코(김민희)와 사랑을 나눌 때는 가감 없이 욕망을 드러낸다. 잘 재련되기보다는 펄떡 뛰는 활기를 가진 숙희는 [아가씨] 1부의 화자였고, 신예 김태리는 숙희와 함께 칸 영화제에 갔다. 스크린 안에서 만만찮은 존재감을 뽐내던 숙희는 어떻게 완성됐는지, 더불어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각인시켜낸 신인 배우에 대한 호기심도 충만해졌다. 첫 장편영화·첫 칸 영화제·첫 언론시사회, 그리고 첫 프로모션 활동을 밟아가고 있는 김태리를 만나보았다.

* [아가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서 긴장한 기색이 없는 것 같더라. 무슨 생각을 했나.
김태리
: 다음에 또 와야겠다. (웃음) 왜냐하면 유럽 자체에 처음 와본 거였고 칸 영화제가 실감도 되지 않아 얼떨떨했으니까. 경험이 더 쌓인 후에 한 번 더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포즈는 연습한 거다. 전날 밤 화장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본 후 허리에 손 올린 모습이 가장 괜찮아 보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덕분에 드레스가 다 젖어서 드라이기로 말려야 했지만.

공식 일정 외에는 뭘 했나.
김태리
: 계속 밖에 돌아다니고, 기차 타고 근교 마을도 한 번 다녀오고. 배 타고 나가면 15분 거리에 굉장히 아름다운 성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하루 종일 걸어 다녔다. 칸에 계속 남아 있는 다른 [아가씨] 팀이 계속 맛있는 것을 사주셔서 그렇게 열심히 먹고 숙소 돌아오면 컵라면도 또 먹고. (웃음)

[아가씨]는 생애 첫 칸 영화제 경험을 하게 해줬다. 오디션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게 있었나.
김태리
: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와 BBC [핑거스미스]를 봤다. 책에서 1부와 2부의 문체가 다르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무척 흥미로웠다. 이 사람의 시선으로 봤다가, 저 사람의 시선으로 사건을 다시 되돌아보는 구성 같은 게 좋았다.

숙희는 어떤 캐릭터였다고 생각하나.
김태리
: 숙희는 아직 명확한 입장이 없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 그래서 닥쳐오는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 되는 아이다. 히데코는 1·2·3부에 입장 차이가 있지만 숙희는 그냥 하나의 흐름만 따라가면 됐다. 처음에는 시나리오가 1·2·3부로 나뉘어 있다는 수렁에 빠져서 고민을 했는데 그런 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하면 안 되겠더라.

숙희를 연기할 때 가장 고민되는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김태리
: 숙희는 도둑으로서의 프라이드와 아가씨에게 가지는 감정이 공존하는 아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자존심이 부각되고, 어떤 장면에서는 아가씨를 향한 사랑이 부각되다 보니 두 개 중 하나를 놓치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희는 분명 17년 동안 도둑으로 살았던 인물인데 자꾸 하녀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두 가지를 모두 놓치지 말고 함께 가져가는 것을 신경 썼다.

박찬욱 감독과 대화를 하면서 캐릭터가 바뀐 지점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태리
: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들어왔는데, 표현할 때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영화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이거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이 대사가 저에게 안 들어와요”라고 말하면 감독님이 “그래, 이게 왜 안 되는 걸까?” 하고 함께 고민해주셨다. 가령 웃음소리 같은 건 좀 바뀌었다. “감독님, 제 고유의 웃음소리가 너무 강해서 다른 걸 하려고 하면 잘 안 스며들어요”라고 하면 감독님도 “그래. 너무 가짜처럼 들린다”고 해주시고. 지금 버전은 원래 시나리오보다 웃음소리를 많이 뺀 거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무엇이었나.
김태리
: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숙희가 히데코의 이를 갈아주는 장면. 히데코와 숙희는 큰 신분 차가 있고 극 중 나이 차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케미스트리가 느껴질까 생각을 많이 했다. 처음에 이를 갈아주려고 했을 때는 분명히 “나 이거 알아. 이가 나서 뾰족해서 아파서 그런 거야. 내가 갈아줄 수 있어” 했을 테지만 골무를 가져와서 히데코의 이를 갈아주기 시작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여기에 히데코의 굉장히 아이 같은 모습까지 잘 살아나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는 상황이 잘 표현됐다. 두 번째는 낮은 담을 넘어서 두 사람이 벌판을 달리는 장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음 놓고 웃고,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신이라서.

히데코와 숙희가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김태리
: 숙희와 히데코가 끌리는 지점에는 계급 차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세계의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오는 신선한 느낌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숙희는 아가씨의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고, 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며 분노하고 해결하려는 아이다. 그래서 히데코는 숙희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숙희의 사랑은 죄책감에서 출발한 것 같다. 그는 아가씨를 속이면서 죄책감을 갖고 있었고, 그 죄책감 때문에 백작을 미워하게 되고, 질투하게 되고, 아가씨를 구해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히데코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무엇으로부터든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숙희가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 숙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다정함이나, 철창 안에 갇혀서 학대 아닌 학대를 받으며 바보같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아가씨를 보면서 가졌을 감정도 더해졌다.

숙희와 히데코가 사랑할 때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묘사되지 않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김태리
: 맞다. 사실 그 시대를 우리가 살아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모르는 일 아닌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문제기도 하다. 성정체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애초에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도 있다. 숙희와 히데코는 그런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가씨]를 찍기 전부터 김민희의 팬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김태리
: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배우가 좋다고 생각되면 그 배우의 전작을 몰아보는 편인데, [아가씨] 캐스팅 당시에는 김민희 선배님이었다. 사실 “무엇을 제일 좋아해?”, “누구를 제일 좋아해?”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굉장히 어렵지 않나. 그런데 그때는 그런 대을 하는 게 가능했다. 박찬욱 감독님께 “지금은 김민희 선배님이 너무 좋다”고 단박에 얘기했는데, 함께 만나 연기를 하게 된 것이다.

김민희의 어떤 연기를 가장 좋아했나.
김태리
: [연애의 온도]. 그 영화에서 김민희 선배가 연기한 캐릭터에는 코미디의 호흡이 있다. 진지한데 웃긴 거, 그런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언니가 정말 잘 살렸다.

재미있는 상황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가씨]를 촬영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기억은 무엇이었나.
김태리
: 하정우 선배가 복숭아를 먹을 때 그 과즙이 내 얼굴에까지 튀는 장면을 찍을 때. 복숭아가 그렇게 터질 줄은 현장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웃음) 바로 앞에 있었는데 정말 빵 터졌다. 중요한 암호(“거의 다 익었다”)가 나오는 장면이라 절대 웃으면 안 되는데. 숭아 과즙이 엉뚱한 곳으로 잘못 튀었다며 몇 번을 다시 찍는데, 웃음을 참지 못해 어깨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옆에 지나가던 스태프분이 “더럽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조언을 해주셨고, 더럽다고 생각했더니 웃음이 멈추더라. 그렇게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정말 다행이었다.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연극반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다. 어떤 점에 끌린 건가.
김태리: 신입단원을 모으기 위한 연극 공연이 있어서 관람했는데, 이거 하면 대학 생활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동아리 활동에 매진했다. (웃음) 가령 연출이 오더를 내리면 함께했던 ‘소품짱’ 친구랑 학회실에서 하루 종일 그 소품 생각밖에 안 했다. 회중시계를 만들어 오라고 하면 하루 종일 “회중시계, 회중시계, 회중시계…. 회중시계를 어떻게 만들지?” 이 생각만 하는 거다. 목걸이형 손거울을 구해서 목공용 본드로 고풍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은색 락카를 칠하면 언뜻 회중시계처럼 보인다. 이런 식으로 소품을 직접 만들었다. 재료로 쓰기 위해 거리에 있는 모든 쓰레기를 주워 담아 오고, 명화가 필요하면 명화인 것처럼 직접 그림을 그리고, 벽난로도 찬장도 직접 만들고. 가스 조명등은 OHP 필름을 끼워서 만들면 된다.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소품을 만들었던 게 정말 재미있었다. 내 대학 생활은 모두 그곳에 있다. 친구도 다 동아리 친구밖에 없었고.

다 같이 무언가를 해낸다는 즐거움이 컸던 것 같다.
김태리
: 그렇다. 같이 뒹굴면서 연극 무대를 만드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인데 모여 앉아서 조명 달고 음악을 찾는다거나 하는 과정. 이러한 즐거움이 배우를 하고 싶어 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연극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 중에서 왜 배우를 선택했을까.
김태리
: 배우를 할 때 가장 즐거움이 컸으니까. 연기를 하다 보면 “어? 이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이 팍팍 들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을 느낄 때 정말 즐겁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연한 순간에 2~3가지의 감정이 확 드는 순간들이 있는데, “헉, 이걸 어떻게 연기에 써먹지?”라고 생각이 들 때도 너무 즐겁다.

푹 배우에 빠진 채 데뷔작을 찍었고, 아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쉬는 동안에는 뭘 하고 싶나.
김태리
: 원래는 시간이 나면 잠을 엄청 잔다. 난 시간만 나면 얼마든지 계속해서 잘 수 있다. 최장 수면 시간도 거의 20시간 가까이 된다. 그 외에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등산도 좋아하고. 이번에 프로모션 활동이 끝나면 여행을 가고 싶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다. 제주도도 너무 좋은데, 요즘 제주도 물가가 너무 올라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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