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서사적 사물들], 생활은 운명을 걸고 있다

2016.06.03
[서사적 사물들]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사물로 변형된 1차, 2차 세계대의 전쟁 도구들을 보여준다. 독일 작가 토마스 홈바흐가 5년 넘게 수집해온 물건들이다. 철모를 법랑 채그릇으로 개조하거나, 방독면 정화통을 설탕통으로 쓰거나, 유탄 파편을 편지봉투 칼로, 야전 곡사포탄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받침을, 소총수 계급장을 코스터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전쟁 도구를 예술 프로젝트처럼 기획하여 변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쓰이는 사물을 찾아 모은 작업이다.

채그릇으로 바뀐 철모 사진을 유독 오래 봤다. 부상을 막기 위해, 총알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튼튼한 헬멧에 굳이 구멍을 내어 물을 통과시키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너무나 다른 위치에서 너무나 다른 쓰임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그 채그릇은 전쟁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전복시키지도 극복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딱 맞는 모양이 있기에 구멍을 뚫어 쓸 뿐이다. 그 차가운 괴리, 거리감이 사진을 자꾸 보게 만든다.

어떤 사물은, 예를 들어 2차 대전 포탄 탄피로 만든 법랑 주전자는 그 형태가 너무 절묘해서 누군가 따로 보여주었다면 이것이 포탄으로 만들어진 생활용품인지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테다. 나는 방금 ‘너무 절묘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쟁과 전투에서 살상을 위해 쓰인 물건이 생활의 영역으로 올 때 무의식적으로 바로 그 용도가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불량 섹터 같은 것이다. 거대한 무엇이 작은 무엇에 비해 월등하다는 반사작용. 대단한 구호를 외치던 그때가 각자의 생존을 걸고 싸우는 지금보다 위대했다는 착시. 눈 앞에 펼쳐진 고통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 어딘가에 전설처럼 환상처럼 둥둥 떠다니는 개념이 있다고 믿는 헛된 여정. 그 불량 섹터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으레 그렇다고 전해지는 대로 생각하게 한다. 들리는 목소리만 듣게 한다. 내 주변에서 의심과 반발을 삭제한다.

[서사적 사물들]에 수록된 사진은 독자의 마음에 의심과 균열을 계속 만들어준다. 2차 대전에서 유탄의 기폭장치로 쓰인 신관 통이 연필깎이 통으로 바뀐 모습은 내 안의 위계와 질서를 초기화시키고, 한 번 다시 보라고 말한다. ‘국가 간의 존망을 걸고 만들어진 잔인한 무기를 재활용한 착한 예술’ 같은 쉬운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신관은 수백의 목숨을 앗았을 것이고 어떤 신관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연필은 역사에 남을 시를 몇 편이고 쓰게 했을 것이고 어떤 연필은 한 번 채 깎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시 채그릇의 사진으로 돌아온다. 철모 주인의 운명을 가늠해본다. 채그릇으로 만든 끼니를 떠올려본다. 생활보다 중요한 전쟁이라는 건 없다. 폭력적으로 위협당하는 일상을 되찾는 노력보다 시급한 철학이라는 건 없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엔 더한 상처도 있다며 커다란 전투에서 얻은 상흔을 보여주는 일만큼 속된 것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서사적 사물들]인지도 모르겠다. 각 사물에 담긴 각기 다른 이야기에 집중할 때 ‘중요한 것은 승리와 패배, 역사와 교훈’이라는 외침은 무의미하다. 포장할수록 더 반짝이는 영광의 그때를 씩씩하게 버리고 지금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겠다. 이 작은 사물의 서사를 놓치지 않겠다. 대단한 이름들이 만들어내는 비석 글씨의 반대편 구석에 무명의 이름들이 채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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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입니다. 무명의 쓰는 사람. 책방 유어마인드와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운영합니다. [책등에 베이다](이봄)를 썼고 아직 이것이 그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책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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