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일 “누군가 ‘나 저 사람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016.06.01
아이에게는 신체적 장애가 있다. 엄마와 할머니는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숨졌다. 그의 곁에는 아빠와 고모, 그리고 태아알콜증후군을 앓는 친구 한 명이 유일하다. 아이는 성장하는 만큼 “보통 사람”처럼 발기를 하고 독립을 꿈꾸지만, 아빠는 늙는다. 연극 [킬 미 나우]는 조이와 제이크 부자를 통해 장애와 비장애, 보호와 자립,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당연히 무대와 객석은 눈물바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진다면, 그것은 모두 라우디 덕이다. 그는 원형 무대 곳곳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모두를 돕고, 누구에게나 솔직하고 끊임없이 말을 걸고, 언제나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러니 그에게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라우디가 없으면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어.”

요즘 “‘인생캐’ 만났다”는 소리 많이 듣죠?
문성일
: 숟가락 얹었죠, 뭐. (웃음) 원 대본에는 조이와 제이크를 제외한 세 인물은 기능적이었거든요. 지이선 작가님이 각색을 하서 라우디·트와일라·로빈 모두 캐릭터가 확 살았어요. 캐스팅된 배우에 맞게 수정하다 보니 배우랑 캐릭터의 케미스트리가 더 맞아 떨어졌고. 저는 대본에 있는 거의 그대로 대사를 하는 편인데, 작가님이랑은 연극 [모범생들]을 같이 작업한 적이 있어서 제 말투를 살린 대사가 너무 감사했죠.

그런데 프레스콜 때는 “원 캐스트 왜 한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잖아요. 
문성일
: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원 캐스트를 해봐서 할 만하겠다 싶었죠. 그런데 각색을 하면서 등장하는 신도, 대사 분량도 많아졌어요. 대본 체크를 해봤더니 심지어 40페이지에서 50페이지까지 페이지마다 라우디가 나오더라고요. 계속 말하고 있어. 끊임없이. 전환도 해야 되고, 조이 태블릿 PC 가지고도 뭐 해야 되고, 아저씨도 업어야 되고. 심지어 옷도 제일 많이 갈아입어요. 극 중에 “아저씨네 가족 분들이 절 노예 취급하는 것 같아요”라는 대사가 있는데 정말 그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니까요.

이 캐릭터가 특히 더 어려운 건 라우디가 “절망의 냄새”로 가득한 공간의 우울감을 없애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일 것 같아요.
문성일
: 라우디는 거침없이 솔직하고 하이 된 상태로 이 작품에서 밸런스를 조절하는 인물이거든요. 저를 자신감 있고 당돌한 배우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인생캐’를 만났다고도 해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렇게 유쾌하거나 사회성이 좋은 타입은 아니거든요. 소극적이고, 무대공포증도 있어요. 진짜로. 그래서 연습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라우디를 내가 아니라 (박)정표 형이나 (정)순원이 형·(임)철수 형·(최)성원이 형처럼 나보다 더 테크니컬하게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배우가 맡았다면 캐릭터가 살지 않았을까?”였어요. 한번은 드레스 리허설 하고 작가님이랑 걸어가다가 “누나, 혹시 다른 작품 할 때 나 또 쓸 거야?”라는 말까지 했었어요. (웃음) 그만큼 바닥이었어요. 오죽하면 작가님이 “얘 징징거리면 받아주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라우디라는 친구가 너무 부러웠어요.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즉흥적인 이 아이의 화술, 사람을 대하는 마음. 그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거든요.

같은 의미에서 연극에 등장하는 다섯 인물 중 라우디가 가장 강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문성일
: 처음 라우디를 연기할 때는 되게 많이 울었어요. 캐릭터 성격상 말을 굉장히 라이트하게 하지만, 사실 그 말들이 너무 아픈 말이라서 참 짠하다. 근데 짠하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라우디라는 인물을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한 거라 최대한 울지 않고 힘을 내려고 해요. 제가 고민할 때마다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는데 트와일라 (이)진희 누나가 그런 말을 해줬어요. “라우디 밸런스 조절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한데 너는 그 이상의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번 작품을 통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어요. 이걸 안 했으면 많이 많이 후회했을 것 같아요.

남들 눈에 보이는 문성일과 실제의 문성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르네요.
문성일
: 생긴 게 좀 세 보이기도 하고, 말도 돌려서 하는 편이 아니고, 평상시에도 텐션이 들어가 있다 보니까 더 그렇게 바라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문성일이 그 작품에 그 캐릭터로 캐스팅됐다고? 그게 가능해?”라는 말이 제일 싫고 무서워서 그걸 떨쳐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거거든요. 공연에 있어서는 6~7주간 연습하면서 서로 했던 약속들, 작품이 갖고 있는 본질 같은 게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걸 정확하게 지키려 하고. 약간 FM적인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민준호 연출님이 저보고 리액션 과의 배우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미지로는 쏴대는 역할인데, 가만 보면 뮤지컬 [트레이스 유]도 우빈 안에 있는 본하였고 [쓰릴 미]도 ‘나’라는 인물의 기억 속에 있는 ‘그’였고. [킬 미 나우]에서도 몰아줄 때는 확 몰아주거든요. 내가 어떤 배우라는 걸 인지해서는 아닌데 본능적으로 그게 맞다고 생각했나 봐요. 너무 틀에 갇혀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무대 위에서의 밸런스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융통성이 없고,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하니까 주변에서는 쟤 정말 당돌하구나, 라고 말할 때가 있죠.

스스로 세운 룰이 확고한 편인가 봐요.
문성일
: 나름의 규칙이 있는 데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질 못해요. 나의 행복, 인생의 낙 이런 것들이 내가 게을러지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저 술도 잘 마시고 잘 놀 거 같잖아요? 근데 술을 못 먹어요. 대신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끝까지 있어요. 하지만 내일 일이 있으면 그냥 가요. 어딜 가도 나만의 공간과 룰이 있어요. 하다못해 내 분장실에 대한 정리도. 그렇다고 그걸 강요하는 건 아니거든요. 이런 행동에는 내가 싫어하는 건 남들도 싫어한다라는 마음이 있어요. 물론 너한테 안 할 거니까 나한테도 하지 말라는 것도 있고.

그럼 어떤 것을 싫어해요?
문성일
: 어디에나 포지션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영역 침범에 굉장히 부대끼는 편이에요. 그건 그냥 기다려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자칫 잘못하면 훈계가 될 수 있거든요. 특히 이 일은 사람끼리 하는 일이라 말 한마디로도 기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결국은 태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모르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얘기해요. 적극적인 태도가 있어야 상대방도 편하게 다가올 수 있거든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아예 얘기를 안 했어요. 하지만 많은 대화는 필요하니까 그 방법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되는 거죠. 너무 방어적이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얘기도 하질 않거든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굉장히 독립적인 부분이 있네요.
문성일
: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어릴 때부터 외동 같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독립한 지도 이제 10년이 다 돼가고.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연세가 있는데도 집안일에 손대는 걸 너무 싫어하셨어요. 어깨너머로 봤던 것들이 몸에 밴 거죠.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지점에서는 받아주는데, 아닌 부분은 그게 누구든지 노라고 외쳐버려요. 만약에 누가 저를 쳤어요? 그럼 그 이유를 납득시키라고 해요.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가 풀려? 재밌어? 그래 알았어. 하지만 여기까지만 받아줄게. (웃음) 그러다 보니까 어떤 연출님은 제가 너무 논리적이라 피곤하다고 하신 적도 있어요.

작년에는 극단을 만들어서 공연하기도 했었잖아요.
문성일
: 나라는 존재보다 작품이라는 퍼즐이 더 중요하고, 퍼즐이 완성되려면 모두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자꾸 전체 그림을 그려서 준호 형도 “넌 나처럼 될 수도 있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근데 연출은, 아우~ 난 못 하겠어요. 역시 자기 그릇이 있구나 싶어요. 연출은 넓은 사람이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림도 볼 줄 알아야 하고 배우의 연기도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하고. 부모들이 공부해야겠다 생각하는 게, 아이가 점점 커갈 때잖아요. 물어봤을 때 답을 줘야 하니까. 연출이 딱 그 마음일 것 같아요. 난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고. 나 같은 배우 만나면 어떻게 해. (웃음) 그래서 그 생각 해요. 나랑 만난 연출님은 진짜 피곤했겠다.

만약 연기를 하지 않는다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성일
: 선생님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 본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당겨야 할 때는 당겨주고 밀어줘야 할 때는 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날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움직이고.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 저 사람이 필요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꾸 대체 불가능한 부분을 찾으려는 것 같아요. 욕심이라면 그게 가장 큰 욕심이겠죠.

그럼 현재 다른 배우가 대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뭐예요?
문성일
: 전성우·윤소호·이재균·손승원·서경수·백형훈 등등 5~7년 비슷한 연차로 이렇게 20대 배우들이 있는데, 성우 형이나 형훈이 형은 이제 30대가 됐지만 나머지 배우는 주변에서 다 20대 배우라는 걸 인지하거든요. 근데 같이 하는 동료들도 제작사도 제가 그들과 또래라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만든 거라 생각해요. 좀 더 성숙하려 했었고, 같은 작품을 해도 그들과는 다른 역을 했으니까. 지금은 그들이 못하는 부분을 어느 정도는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는데, 더 해야죠. 라우디가 감사한 건 이 역할을 통해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거든요. 문성일이 저런 따뜻한 역할을 할 수 있구나.

최근에 뮤지컬보다 연극을 더 자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문성일
: 공식적으로는 2011년에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데뷔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2009년부터 공연을 했거든요. 데뷔가 빨랐고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 너무 큰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에, 실력보다는 티켓파워에만 포커싱이 맞춰지는 면이 있어요. 스스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킬 미 나우]는 정확한 콘셉트와 색깔이 있는 연극열전, (이)지현 선배님이나 진희 누나처럼 제가 절대 만나볼 수 없는 선배님들과 작업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죠. 호기심과 모험? 스스로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거 정말 웃긴 얘긴데 배우·스태프가 만나는 첫 상견례 날 추리닝을 입고 갔어요. 내가 제일 어리고 심지어 뮤지컬배우인데 왠지 연극 선배님들 앞에서 멋부리다가는 “역시 요즘 20대들은 겉만 신경 쓴다”는 얘기 들을까 봐. (웃음) 근데 다들 갖춰 입고 온 거예요! 심지어 (배)수빈 선배님이랑 (윤)나무 형은 “왜 이러고 다니냐. 신경 좀 써야겠다”고 했다니까요. 연극 선배님들 만나니까 정말 초심으로 돌아가서 ‘연습실에서는 추리닝을 입어야 된다’는 생각에 이러고 왔다 했더니 “우리 그렇게 구질구질한 사람 아니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연극배우면 연극배우답게! 이런 마인드가 은연중에 있었나 봐요. 편협했던 거죠.

어떤 불안함이나 조급함 같은 게 있었어요?
문성일
: 불안함이야 항상 있죠. 뮤지컬에서 연극으로 넘어오는 과도기가 있었어요. 당연히 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잖아요. 뮤지컬로 시작했고 관객들이 많이 찾는 작품을 했는데, 이제는 잘 안 하니까. 알고는 있었어도 현실로 다가오니까 너무 무섭더라고요. 내가 만약 티켓을 팔 수 없는 배우가 되거나 트렌디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내 일자리가 없어지는구나. 어느 순간 새로운 동료들이 생기고 사라진 동료들도 있어요. 그 전환이 굉장히 빠른 거예요. 그 벼랑 끝에 내몰린 마음이 저를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어요. 스타 되면 좋죠. 하지만 그건 정말 로또처럼 터지는 거고, 저는 이걸 오랫동안 즐기면서 하는 게 꿈이에요. 오랫동안 하려면 뒤처지면 안 돼요. 20대 초·중반만 해도 독특하고 트렌디한 이미지로 주목받았지만 이젠 아니거든요. 잘해야 되는 때가 오는 거죠.

선배들은 뭐라고 해요?
문성일
: 지랄하고 있네. (웃음) 내년에 서른이니까 아직은 괜찮다고 하는데, 저 스스로가 그 마음이 아닌 거죠. 정말 잘하는, 신뢰가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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