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절반의 인민주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2016.05.27
미국 대선 경선이 한창이던 시절 유행하던 농담 하나.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버니 샌더스라면 사상 최초의 유대인 대통령, 마르코 루비오라면 최초의 라틴계 대통령, 테드 크루즈라면 최초의 캐나다 출신 대통령,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라면,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 이 농담은 더 이상 웃기지 않다.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은 사실상 공화당 후보로 확정됐고, 본선이라고 농담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트럼프 지지자는 주로 백인이고, 대체로 남성이며, 대학을 다니지 않은 중하층 노동자가 많다. 이들은 자유무역과 이민자가 자기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느낀다. 트럼프는 우스꽝스럽지만 멍청이는 아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 돈은 멕시코가 내라”라거나 “중국산 제품에 관세 45%를 물리자”는 트럼프의 유명한 막말은 지지층의 정서를 정확히 대변한다. 자유무역을 성배로 여기는 정당 공화당은 이 분노한 유권자들에게 당의 근본을 부정당했다. 그래서 요즘 영어권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realignment(재편성)’다. 정당의 지지 블록이 거대한 재편을 겪을 때 쓰는 용어다.

정당은 무엇보다 ‘갈등을 대변하는 결사체’다. 핵심 갈등이 변하면 정당도 바뀐다. 새로운 핵심 갈등이, 이를테면 자유무역 찬반이 터져 나오면 정당체제는 그에 적응하거나 뒤틀리며 파열음을 낸다. 20세기 정치학계의 거목 E.E.샤츠슈나이더(1892~1971)는 정당 재편성을 이론화한 선구자 중 하나다. 샤츠슈나이더의 대표작 [절반의 인민주권]은 짧은 분량(한국어판은 200쪽이 좀 넘는다)에 정치학과 정당론의 핵심 주제를 두루 다룬 고전인데, 미국 정치지형의 재편성도 이 책에서 명쾌하게 묘사된다.

19세기 미국 내전(남북전쟁) 이후 민주당은 남부 지역당으로 전락했고, 북부와 서부를 장악한 공화당이 중앙권력을 차지했다. 이 구도를 뿌리부터 뒤흔든 것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주도한 뉴딜 연합이다. 루스벨트는 보수파 남부 백인에다 노동계급과 흑인을 묶어내는데, 보수적 지역당이었던 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환골탈태에 가까운 노선 변화를 선보인다. 샤츠슈나이더는 이 뉴딜 재편성을 ‘1932년 혁명’이라고 부른다. 샤츠슈나이더 사후에 공화당은 남부를 빼앗아 오며 또 한 번 재편성을 만들어낸다. 이 거대한 엎치락뒤치락 몇 번으로 내전 이후 미국 정당사 150년을 얼추 묘사할 수 있다.

재편성은 아주 드문 사건이다. 우리가 그걸 2016년에 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징후는 있다. 루스벨트 이후 공화당이 만난 최강의 적이 트럼프라는 농담 같은 논평은 미국 정당사의 본질을 꿰뚫는다. 이 기괴한 후보가 반(反)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GOP(Grand Old Party, 공화당의 별명)’의 노선을 돌리거나 아예 간판을 내려버린다면 뉴딜 혁명 이후 가장 근본적인 재편성이 등장할지 모른다. 기록을 업으로 삼은 처지에서야 대격변의 등장은 쓸 거리가 많아지니 언제나 행운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운이 나쁜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인더러 뽑으라고 맡겨두기엔 너무 중요한 자리인 것 같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14개월 동안 사회 기사를 썼다. 2016년 1월부터 경제와 국제를 취재한다. 쟤도 뭐 하나는 사람답게 하는 게 있겠거니 기대를 버리지 않는 조직에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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