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작사가│① 서지음 “내 안의 ‘중2’를 철들지 않게 할 거다”

2016.05.25
최근 아이돌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다. EXO의 ‘으르렁’과 러블리즈의 ‘Ah-Choo’·레드벨벳의 ‘Dumb Dumb’ 등을 작사한 서지음은 팀의 이미지를 한눈에 그려내는 가사를 쓴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가사를 빚어낼 수 있는지, 그에게 하나하나 물었다. 서지음 작사가의 대답은 좋은 가사를 쓰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자 성실한 직업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최근 러블리즈와 오마이걸, Mnet [프로듀스 101] 등 작사한 결과물들이 한꺼번에 나왔더라.
서지음
: 실제 작업한 기간으로 따지자면 예전에 한 것과 근래 한 것 들이 반반 정도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돼서 결과물이 더 많아 보이는 것 같다. 요즘에도 작업은 계속 하는 중인데, 엄청난 양이라 곧 재충전 겸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다. 가사를 쓰다 보면 한 번씩 머릿속이 먹구름 낀 것처럼 흐릴 때가 있거든. 여행을 다녀오면 개운해지는 느낌이라 새로 작업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프로듀스 101]에서는 ‘Yum-Yum’과 ‘Fingertips’·‘Crush’까지 세 곡의 작사를 맡았는데, 팀의 색깔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 더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서지음
: 아무래도 신인보다는 캐릭터가 있는 팀이 편한데, [프로듀스 101]의 경우에는 멤버들의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아예 투명한 상태로 시작했다. 일단 작곡가분이 요구하는 내용을 많이 참고하기도 했고, 곡을 최대한 많이 들으면서 캐릭터를 읽어내려고 한 거다. 가이드를 들어보니 ‘Yum-Yum’은 톡톡 튀고 발랄한 분위기, ‘Fingertips’는 그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성숙한 느낌이더라. ‘Crush’는 ‘덕통사고(교통사고처럼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어떤 분야의 팬이나 마니아가 되는 것)’라는 콘셉트를 잡고 만들어간 곡이고.

가사를 쓸 때 따로 레퍼런스를 찾진 않는 건가.
서지음
: 90% 정도는 상상력에 의존한다. 가끔씩 어디선가 받은 영감을 메모로 써두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노래에 이걸 꼭 넣어야겠어’ 하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끼워 맞춘 느낌이 나거든.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 그러니까 친구한테서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통해서 본 것 등이 작업에 몰입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특히 나는 어릴 때부터 책과 같이 자라온 편이었는데 그런 경험들이 작사에도 은근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SF나 추리소설·판타지 등 내가 실제로 겪기 힘든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그래서인지 판타지 계열의 노래를 만나면 물 만난 고기가 된다. (웃음) EXO의 ‘나비소녀’나 ‘월광’·‘Black Pearl’, 오마이걸의 ‘CLOSER’·‘LIAR LIAR’ 같은 것들 말이다.

기획사 쪽에서 그런 분위기를 주문할 때도 있나.
서지음
: 보통 열에 여덟, 아홉은 가이드라인을 아주 디테일하게 주지 않는다. 그냥 자유롭게 써달라고 한다. 그래서 노래를 들어보고 어느 정도는 판타지스러운 가사를 넣어도 되겠다, 잘 어울리겠다 싶으면 넣는 편이다.

그럴 경우 팀이 그동안 유지해온 캐릭터와 어긋나지는 않을까?
서지음
: 아무래도 캐릭터나 스토리텔링은 앨범마다 조금씩 달라지지 않나. 해당 가수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를 때는 전작을 참고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들어온 가이드곡이다. 이 노래를 회사에서 골랐다는 건, 이 안에 있는 느낌이나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서라고 생각하거든.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을 듣고 느껴지는 부분을 잘 살려내면 된다고 본다. 하나의 곡으로 회사와 작곡가와 내가 소통을 하는 거지. 가이드라인을 크게 주지 않아도 ‘이번 콘셉트는 약간 이런 느낌으로 가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감이 온다.

그래도 f(x)의 ‘Electric Shock’는 처음부터 ‘4행시를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들었다.
서지음
: 가이드를 들었을 때 그 요청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전 전 전류들이”라는 부분의 박자가 ‘딴 딴 따다다단’이라 운을 짚는 것 같았고, 그게 사행시랑 비슷하게 들렸다. 전혀 이질감이 없어서 사행시를 쓰는 게 자연스럽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려운 작업이라, 지금 말하려면 굉장히 창피한 단어들을 이것저것 많이 넣어보기도 했다. (웃음) 결국 다 탈락하고 “전기충격”이 살아남았다.

작사한 곡들 중 ‘Electric Shock’의 “전기충격”처럼 핵심 단어에서 이미 그룹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보이는 것들이 많더라. 예를 들어 EXO의 ‘으르렁’이나 러블리즈의 ‘Ah-Choo’·레드벨벳의 ‘Dumb Dumb’ 같은 곡들. 
서지음: 일단 ‘Dumb Dumb’은 가이드 버전에서부터 ‘Dumb Dumb’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그 자리에 다른 후보들을 올려봤는데 그만한 게 없어서 다 탈락됐고, ‘Dumb Dumb’을 살려서 쓰다 보니 나머지 구절의 가사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사실 작사를 할 때, 뭔가 사람들 머리에 남을 만한 문구를 넣기 위해 많이 의식한다. 꽂히는 후렴구를 만들 때는 개그맨들이 유행어를 만드는 식의 접근을 하는 거다. 사람들이 이걸 많이 흥얼거릴 것인가? 많이 기억하고 부를 것인가? ‘으르렁’도 그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가사다. 반복되는 후렴구에 어울릴 만한 글자를 몇백 개씩 뽑아놓고 어떤 게 가장 임팩트 있는지, 어떤 게 가장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지 혼자만의 경쟁을 열어보는 거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들어보기도 하나.
서지음
: 초반에는 그럴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직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점점 제3자의 눈으로 내가 쓴 가사를 바라보는 노하우가 생겼달까. 하지만 곡이 공개된 후에 리스너들의 반응은 여전히 찾아본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뭔가.
서지음
: 문장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칭찬을 많이들 해주셔서 조금씩 힘이 더 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X맛’이라거나 ‘중2병’처럼 안 좋은 반응들도 많다. ‘Electric Shock’와 ‘으르렁’을 썼을 때 특히 그랬지. 동생한테 이런 댓글들을 보여주면서 “야, 이 사람들이 나보고 ‘X맛’이래” 이랬더니 동생이 가만히 있다가 “음, 좀 그런 것 같긴 해”라고 하더라. (웃음) 그리고, 봤던 반응 중에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한글 파괴다, 문법 파괴다, 이런 것들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변명해보자면 나는 한글을 사랑하고, 최대한 문법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앞으로도 문법을 지키면서 예쁜 표현들을 많이 찾아볼 거다.

해외 팬들이 많은 K-POP의 특성상 외국어 가사의 중요성도 높지 않을까 싶었다.
서지음
: 그 때문에라도 나는 한글을 많이 넣고 싶어 하는 타입이다. 만약 영어와 한글이 비슷한 임팩트에 비슷한 느낌이라면, 한글을 선택한다. 한글이 들어갔을 때 어색해지는 구절이 있다든지, 의뢰하는 쪽에서 ‘이쪽에는 영어를 살려주세요’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으르렁’의 중국어 버전도 다른 부분과 달리 후렴구만은 ‘으르렁’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대체할 단어가 없다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한글도 널리 알려질 수 있구나, 싶어서 오히려 기뻤다.

원래 전공이 언어 관련인가.
서지음
: 아니다. 음악도 언어도 문학도 아니다. 그냥 다 좋아한 것뿐이다. 이걸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작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는 음악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니까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 작사 학원에 1년 정도 다니다가 기회가 닿아서 하동균 씨가 부른 SBS [부탁해요 캡틴] OST ‘가슴 한쪽’으로 데뷔한 거다.

데뷔가 굉장히 빨랐다.
서지음
: 그렇다. 데뷔도 빨랐고,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티서 ‘Twinkle’처럼 유명한 가수의 타이틀을 쓴 것도 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이돌 가사를 쓴 건 ‘Twinkle’이 처음이었는데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나는 걸 보면서 너무 떨리고 꿈같더라. 가족들도 밖에서 노래가 들릴 때마다 “누나, 나 지금 세차장 지나가는데 누나 노래 나와”, “나 어떤 가게 앞 지나가는데 딸 노래 나와” 하고 전화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다. (웃음) 이제는 적응이 돼서 내가 쓴 가사가 나와도 신기하지는 않고 ‘아, 기쁘다. 감사하다’ 정도의 감상이 든다.

막연하게 꿈꿀 때와 직접 일을 하는 건 또 다르니까.
서지음
: 최근까지도 고민한 게 이거다. 예전에는 이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덤볐다면, 지금은 ‘아… 또 일이네’ 이렇게 된 거다. 나도 모르게 일을 미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 회의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냥 인정을 하고 나서 편해졌다. 아무리 좋아했던 거라도 이제는 내 일이니까 가끔은 재밌지 않을 수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 있는 거다. 그러고 나니 압박감도 줄어서 지금은 이전보다 좀 더 무거운 생각 없이 작업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옛날에는 음악도 즐거움을 위해서 들었다면, 지금은 저절로 일 생각을 하게 된다. 팝송을 들으면서 한국어 가사를 붙인다면 어떻게 쓸지 궁리한다든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일이고, 그렇게 돼버렸는걸. (웃음)

작사가 지망생들까지 가르치게 됐는데, 무엇이 가장 기본이라고 이야기하나.
서지음
: 일단 작사가라는 의식을 버리고 곡이 만들어놓은 캐릭터에 몰입하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의 입으로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 수업을 하다 보면 작사가의 존재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가사를 많이 받는다. 내 글을 가사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튀어나오면, 그건 가사가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과 이 노래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거든. 노래를 듣고 노래가 하고 있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 잘 써야겠다, 멋있게 써야겠다, 기가 막힌 문장을 만들어내야겠다, 이게 작사가의 의식인데 그러면 오히려 불필요한 수사를 하게 된다. 이런 건 보면 읽힌다.

노래 속 화자가 된다는 건 어떤 뜻일까?
서지음
: 예를 들어 드라마 대본이라고 치면, 작가들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각기 다른 등장인물의 대사를 정말 그 사람이 된 것처럼 쓰지 않나. 그거랑 똑같은 것 같다. 해보지 않아서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지만, 한 번 겪어보면 누구든 할 수 있을 거다.

앞으로도 아이돌 쪽 가사를 주로 쓰게 될 텐데, 그렇다면 본인도 십 대, 이십 대의 감성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겠다.
서지음
: 그런데 사실 지금도 나이가 꽤 많다. (웃음) 어떨 때는 내가 가사를 쓰고도 약간 오글거리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철들지 않은 ‘중2’가 내 안에 내재돼 있나 보다. 그 아이를 계속 철들지 않게 해야지.

시간이 흐르는 게 걱정되지는 않는 걸까.
서지음
: 미리 사서 걱정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작사가로 데뷔할 때부터 ‘어떤 화자든 다 될 수 있다’고 다짐했고, ‘나는 이런 부분이 좀 약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언젠가는 젊은 감각의 가사를 쓸 수 없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냥 나를 믿어주고 싶다. 어떤 식으로든 제한을 두지 않고 뭐든 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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