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김다흰 “여행지가 유럽이든 인도든 결국은 사람이에요”

2016.05.18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박선희 연출과 스스로 흐름을 만드는 배우 김다흰은 2012년 [인디아 블로그] 에피소드 2를 시작으로 [터키블루스]·[인사이드 히말라야]까지 3편의 여행연극을 만들었다. 5년간 인도·터키·네팔을 함께 여행하며 겪었던 일들은 그대로 무대 위에 담겼고, 배우들은 리얼리티에 가까운 모습으로 무대에 선다. 이들이 만드는 연극이 거창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연극들에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가에 대한 세심한 탐구가 있다.
 

다흰 씨의 커리어는 여행연극 아니면 크리에이티브 VaQi 작품으로 구분이 되잖아요. (웃음) 한 달 반 텀으로 두 번의 [인디아 블로그]를 공연하고 있는데 꾸준함의 동력이 뭘까요?
김다흰
: 사실 처음 연우무대랑 계약할 때만 해도 [인디아 블로그]가 첫 작품이라고만 되어 있었어요. 연우무대의 다른 작품들, 뮤지컬도 하고 그러면서 나의 발을 넓힐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웃음) 그런데 2년 계약이 끝나고도 이 팀이 좋아서 3년을 제 선택으로 같이 왔어요. 저희는 매번 극에 변화를 주면서 공연을 만드는데, 실험하고 변화하는 그 과정 때문에 스스로도 지루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공연을 자주 하지 않더라도 캐스트가 바뀌지 않으니 무대 위에서도 밖에서도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고 감도 오고.
선희: 어떤 사람은 다흰이를 제 페르소나라고도 하는데 (웃음) 다흰이는 우리 팀에 없는 캐릭터예요. 솔선수범하고 청소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하고.
다흰: 가정부네요.
선희: 그리고 쇼바. 충격흡수장치. (웃음) 가끔은 우리를 점핑하게 해주는 스프링이기도 하고. 배우들에게 각자 대사를 쓰게 하는데 (전)석호랑 (박)동욱이랑 많은 실패와 좌절 끝에 에피소드 1을 만들었다면, 다흰이는 처음부터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고 우리한테 이 가치에 대해 설명도 해줘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경험을 어디까지 공유해야 하는가를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4년 동안.

크리에이티브 VaQi에서도 공동창작을 하는데, 어떤 점이 달랐던 건가요?
김다흰
: ‘무대 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아?’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원래 목표의식을 세게 갖고 하는 타입인데 이렇게 부담 없이 무대를 즐겨도 되나 싶었고. 졸업한 형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편하게 하라”는 말을 밖에서 가장 많이 듣는다고. 사실 저는 학교에서도 되게 편하게 연기하는 쪽에 속한 사람이라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죠. 거기에 연극은 메시지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자극해서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무언가를 수행한다거나 하는. (웃음)
선희: (임)승범이는 부산사투리도 안 쓴다고 했었어요. 배우라면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이제 보니까 얘네가 일관성이 있네.

그렇다면 연출님은 다흰 씨를 어떻게 설득한 건가요. (웃음)
박선희
: 저도 얘도 연극영화과 출신이거든요. 근데 이런 소소한 이야기와 마음을 정확하게 설득할 무언가가 없어요. 그냥 이게 재밌지 않냐는 말밖에는요. 저도 당연히 공연으로 관객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서로의 인생에 어떤 영감을 주길 바라지만 1시간 반짜리 공연을 보고 인생이 바뀌기란 쉽지 않거든요. 내가 영화관 가서 신나게 보고 오는 것만큼은 해줄 수 있나? 그것도 어려워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했을 때 남들도 즐거워할 수 있냐는 건 결국 모 아니면 도인데, 대단하게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진 않더라도 누군가가 보러 와주고 최소한 이걸 통해 애들에게 발판이 되어준다면 된 거 아닐까.

언제쯤 이 작업에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김다흰
: 한 한달 반쯤? 2014년에 [터키블루스]를 최선을 다해서 했고, 이 작품을 통해서 ‘나라는 배우를 관객들이 좋아할 수 있구나’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근데 연출님이 막공을 보고 극 중에 나오는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를 들으면서 엄청 우셨다는 거예요. 작품에 대한 잔잔한 울림이 있으셨나보다고 생각했는데 내 연기를 만족스럽게 이끌어내지 못해 억울해서 울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의 저는 연출님의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저를 크게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는 패에 대한 자신감이 무너진 거죠. 그래서 이번 [터키블루스] 재공연 때 나는 무엇을 변해야 하나 싶어서 크게 흔들렸어요.
선희: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저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그대로 보여지길 바라거든요. 그게 매력적이니까. 공동창작을 한 것도 리허설 때 너무 재밌는 배우들이 무대에만 올라가면 껍데기를 하나씩 쓰느라 자꾸 이상해져서였거든요. 물론 그게 무대 화술이지만, 저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공연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막판이 되니 어느새 안정감이 생겨서 고통스러워하는 시완이를 연기하는 김다흰이 있었어요. 자신을 감춘. 물론 당시 만족한 분들도 많았고 김다흰이라는 희미한 컬러의 배우가 하나의 입체적인 사람으로 튀어나와 팬도 생겼죠. 하지만 제가 아는 김다흰의 매력은 거기에 안 나왔어요. 얘는 나이가 제일 많음에도 재롱도 잘 부리고 몸도 제일 잘 쓰는데 그걸 안 보여줘요. 나는 다흰이의 진짜 모습을 이용한 연기를 언제 써보나 싶었던 거죠. 그래 졌다! 니 연기해라! 잘 먹고 잘 살아라! 흥! 이런 거였어요. 근데 눈물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웃음)
다흰: 연출님이 원했던 게 단순한 내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저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게 한 달 반쯤이고. 그전까지는 그럼 내가 어떤 캐릭터로 어떻게 고통을 연기해야 하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하느라 스스로 고립되고 안 풀렸던 것 같아요.

어떤 틀을 깬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다흰
: 굉장히 미지의 무언가를 찾아가는 게 연기라고 생각했어요.
선희: 아니 그런 연기도 있고. 넌 나가면 또 미지의 길을 찾게 될 거야.
다흰: 미지의 길을 찾는 거 엄청 잘하지! (웃음) 예전에는 내가 이야기도 써야 되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볼 수도 있어서 공동창작을 대본극보다 더 재밌어했었어요. 약간 일 중독적인 성향이 있어서, 해야 할 것이 많이 있을 때 더 행복해하거든요. 그래서 ‘대본극은 정해진 루트 안에서 길만 찾아가면 되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뻔한 연기를 한 건 아닐까 싶더라고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그래도 물론 최선은 다 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젠 대본극을 맡으면 그것도 공동창작처럼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분의 성격이 굉장히 극과 극이라 여행스타일도 서로 다르죠?
김다흰
: 저 여행 가면 되게 바빠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 돌고 유명한 여행지는 다 가보고. [인디아 블로그]를 하기 전에 공연으로 해외를 10번 정도 나갔었는데, 그동안에도 타인과 반나절 이상을 보내본 적이 없어요. 사람을 만나서 돌아다니기보다는 명소 가고, 자연 즐기고, 사색하고, 책 읽고 그런 걸 굉장히 많이 했어요. 타지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으니까. 여행은 제 삶의 하나의 돌파구 같은 것이기도 하고.
선희: 다흰이는 예술가라면 고독을 즐기고 그것이 어떤 자신의 특별한 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내가 만난 다흰이는 사람들하고 되게 어울리고 싶어 하거든요.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여행에 있어서는 어떤 게 더 평범한 건지 모르겠어요. 이제 저는 여행 가서 대단한 걸 많이 즐기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거든요.

올겨울 [인디아 블로그]에서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건 기존의 여행스타일과는 다른 방식이지 않았어요?
김다흰
: 사람하고 만나는 여행도 있다는 것을 [인디아 블로그] 때문에 간 인도에서 처음 알게 됐어요. 공연으로 간 것이기도 했고 인도라는 나라의 특성도 있어서 스스로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봤던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탠도 해보고.
선희: 애들이 여행을 전투적으로 즐기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여행지에서는 얼굴에 경계심이 드러나잖아요. 인도 첫 번째였나? 석호랑 동욱이랑 오르차라는 곳에 있었어요. 한국 사람도 거의 없고 오는 길도 쉽지 않은 곳인데 한 남자애가 죽어가는 얼굴로 들어오더라고요. 우리는 인도 여행 중반이었고 3일째 오르차에서 빈둥거리고 있었거든요. 쟤 좀 구해줘야겠다 해서 (웃음) 차이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우리 숙소 진짜 그지 같았는데 같이 묵자고도 하고 같이 돌아다니고. 저도 처음엔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과거에 저를 그렇게 받아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다흰 씨는 어떤 명분이 있어야 움직이는 스타일이신가 봐요.
김다흰
: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엄청나게 목표를 찾아서 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동안 살았던 35년을 생각해보면 배우도 막 원해서 된 게 아니고. 근데 어떤 계기가 생기면 그걸 받아들인 후에는 다른 걸 안 보고 쭉쭉 가는 편이에요.
선희: 전 애들이 더 솔직하고 더 과감하게 부딪히길 바라요. 다흰이는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배우 하는 애들 대부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에너지가 꽉 차 있거든요. 그래서 완벽하진 않아도 공연할 거니까 그냥 맘껏 하라고 해요. 얘는 인도라서 달랐다고 하는데 저는 동의 안 해요. 분명히 힘든 곳은 있지만 어떻게 마음먹느냐의 문제거든요. 이번에 유럽에 꽤 오래 있었는데, 거기서도 결국은 사람이에요. 유스호스텔에 혼자 와인을 병째로 마시는 사람이 있어서 말 걸고 얘기하고 같이 여행하고 그랬어요. 혼자 가면 어쩔 수 없이 외롭고 그럼 누군가를 만나게 돼요. 누구나 친구가 되길 원해 사실.
김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도 약간 그런 욕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비포 선라이즈]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을 갈구했던 것 같아요. 항상 도미토리에서 묵었거든요. 외국 친구들하고도 얘기해보고 싶었는데 몇 마디 이상을 못 가니까 두려움이 컸었어요. 근데 인도를 가면서 ‘까임’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고, 그런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 전에는 상대방을 보고도 저 사람은 그래도 혼자 있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쫄았던거죠. 항상 혼자 여행하는 거 만족스럽다고 했는데 다 개소리였네. (웃음)

확실히 네이티브가 아닌 이상 언어의 장벽은 존재하니까요.
박선희
: 외국인에게 말 걸기 쉬운 2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바라나시 같은 데서 기차 티켓 없을 때예요. 나처럼 화내는 애들이 있어, 독일에서 온 애들 같은. (웃음) 나도 모르게 가서 “You know” 하면서 성질 있는 대로 내면 걔들도 막 화내고 그럼 그걸 계기로 이런저런 얘기를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술 먹을 때. 뉴욕에서 공연 보기 전에 바에서 맥주랑 햄버거를 먹다가 스패니시 애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나한테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맥주가 세서 한 잔 마시고 취한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겁이 없어지더라고. 뉴욕에 처음 왔는데 핸드폰 밧데리가 떨어졌다고 하니까 걔가 “battery?” 하면서 이거 가지라고 소형 배터리를 주는 거예요. 왜 주냐고 했더니 넌 여기 처음이잖아! 이래요. 그래서 앞으로 내가 어디 가서 충전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되냐 문법적으로 잘 모르겠다 했더니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요? 그냥 핸드폰 들고 “please” 하래. 술을 마시니까 영어를 못하는 게 창피하지 않더라고. 좋았어요. 그런 게 작은 일탈이지 뭐.
김다: 여행 가서 술집에 혼자 들어가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어떤 성과도 없이 숙소로 돌아오는 내 모습이 무서워. 실패를 엄청 두려워해.
박선: 무대에서도 완벽하고 싶어서 저랑 오래 걸린 거예요. 망해도 망한 게 아니라는 게 이해가 안 돼서. 절대 얘는 망하지 않는 애인데.

이번에는 남미로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박선희
: 한 나라가 아니라서 아직도 엄두는 잘 안 나는데 결국에는 성격상 가봐야 알 것 같아요. 땡기는 게 없으면 할 수 없고 있으면 맞닿는 거죠. 인도에서도 안 땡기면 버텼어요. 그게 제일 돈도 안 들고. (웃음) 그러다 사람들 한둘씩 알게 되고. 이번에 다흰이가 체게바라 쪽으로 꽂았거든요. 근데 오토바이 여행은 생각 없는 거야?
김다: 오토바이는 정말 무서워요. 이래저래 찾아보고 있는데 버스로 갈 수가 있더라고요. 그 루트를 가보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처음 생각한 건 파타고니아 트래킹이었는데 시즌이 아니라서 많은 곳이 안 열었을 거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박선: 근데 그런 말, 사실은 가보면 다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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