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 “요즘은 무언가를 이뤄서가 아닌 그냥 그 자체로 행복한 것들이 있어요”

2016.04.20
뮤지컬 [명동 로망스]는 ‘요절’과 ‘천재’라는 단어 뒤에 가려진 이중섭과 박인환, 전혜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중에서도 박인환은 다정하고 사교적인 인물로 등장해 작품을 감싸 안는다. 낯선 이에게는 언제나 손을 먼저 내밀고, 고료 모두를 술과 옷에 쏟으면서도 ‘생명수’를 기꺼이 다른 이와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 제 할 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모두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유난히 너른 품을 가진 박인환에 대한 궁금증은 그를 연기한 윤석원에게 가닿았다.

박인환 시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셨나요?
윤석원
: 솔직히 잘 몰랐어요. 박인환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제가 그분의 깊이를 다 따라갈 수는 없어서 여전히 잘 모르겠는 부분은 있어요. 하지만 참 외로웠던 사람이고, 정말 한 판 잘 놀다 간 사람 아닌가 싶어요. 그 시절의 예술가들 참 멋있죠.

사후 평가로 접하는 실존 인물의 경우 자칫 잘못하면 관객에게 박제된 느낌을 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서 흥미로웠어요.
윤석원
: 피카소 같은 경우도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심도 깊게 알다 보면 여성편력도 심했고 괴팍한 성격이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 예술가들과 지금의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제일 처음 접근한 건 술이었고요. 아하하하. 심오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술 먹으면 다 똑같지 않을까. 박인환은 약간 비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항상 김수영 시인이 박인환 시인에게 나쁜 말을 했었다고 하는데 주로 같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정도 정이 있으니까 그런 말도 하는 거지 정말 싫어하면 말조차 꺼내지 않잖아요. 그런 것들을 봤을 때 그들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그래서 울고 징징거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한 판 잘 놀다 간 사람’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윤석원
: 지금은 제가 나이가 들어서 바뀐 부분이 있는데, 20대 후반에 생각했던 것들을 박인환 시인도 많이 하고 있었더라고요. 극에 ‘그런 세상’이라는 곡이 있어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 표현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아마 그는 마음껏 무엇을 행해도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되지 않고 저 사람과 내가 모두 다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어요.

눈치 보지 않는 20대를 보내셨나요?
윤석원
: 사실 어릴 때는 되게 조용한 성격이었는데요. 변정주 연출 형을 만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형이 권해준 책들이나 저한테 줬던 연기적인 베이스라든가 사상적인 면? 어떻게 보면 저한테 영향을 제일 많이 준 사람일 거예요. 예전에는 정치에 대해 생각을 안 했었거든요. 정치인들 다 거기서 거기지 싶었는데, 정치라는 게 결국 제일 정점에 있는 거라 그게 바뀌지 않으면 우리 삶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런데 20대 때는 뭘 많이 모를 때잖아요. 아집으로 ‘내가 생각하는 연기는 이런 거야. 니들은 틀렸어!’ 막 이러면서 누가 욕하면 같이 싸우기도 했고, 나랑 다르게 왜 이들은 배우라는 일을 직업으로 빨리 생각하는 걸까 싶어서 화가 나기도 했어요. 20대 때는 정말… 쓰레기였죠. 좀 단순 무식했어요. 그러다 2009년에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끝나고 한 2년간 연기 안 하고 다른 일을 했어요. 그냥 이 작은 판에서 얽히고설켜 서로 미워하는 것들이 다 싫어지더라고요. 그때 그냥 할 걸. 이제는 아는 사람도 없고. 아하하하.

어떤 일 했어요?
윤석원
: 노량진에서 일했었어요. 생선 잡아서 손질하고 포장하는 일. 보따리장수도 했고. 보따리장수는 전문용어로 COB라고 하는데 (웃음) 솜이나 지퍼 같은 건 그냥 세관을 거치면 되게 비싸거든요. 대신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요. 불법적인 건 아니고. (웃음) 택배회사도 다녔고요. 사실 제가 연차로만 따지면 연기를 한 게 얼마 안 돼요. 한 5년 했나?

지금 시장이 전보다 나쁘면 나쁘지 더 좋지는 않을 텐데 왜 돌아왔어요?
윤석원
: 무슨 공연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일을 하다 보니까 그냥 또 갑자기 하고 싶더라고요.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시장은 똑같아요. 그런데 2년간의 경험이 저를 많이 바꿔놓은 거죠. 그전까지는 새벽에 일하시는 분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분들 거의 밤을 꼴딱 새워가면서 정말 힘들게 일하시는데 하나같이 다 웃으면서 해요.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힘들다고 투정이나 부리고 싸우기나 하고 그랬던 건 아닐까. 여기에 자연스레 나이도 먹으니까 아끼는 사람들 챙길 시간도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나 좋은 사람 챙기기도 바쁜데 나 욕하는 사람까지 어떻게 챙겨요. 나한테 주어진 일 열심히 하자가 됐어요.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을까요. 박인환도 그렇지만, [러브레터]의 아키바나 [마스터 블랜더]의 바커스도 품이 넓은 인물들이라 인상적이었거든요.

윤석원
: 범위가 좀 넓어졌다고 해야 되나? 지금 제가 서른여섯인데 지금 생각하는 연기론은 ‘아는 만큼 나온다’거든요. 극이라는 건 어차피 사람에 대한 것인데, 제가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문학에서 말하는 다른 견해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박인환도 그래요. 앞에서 언급한 ‘그런 세상’이라는 곡은 신분증 때문에 거짓을 말하려는 선호에게 예술가들이 누구에게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고 얘기하거든요. 그 장면 연습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시를 쓰고 그렇게 투쟁하며 살았던 사람이 화를 낼까. 그런 고수 정도 됐으면 상대방의 생각을 더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주입식으로 이게 맞다고 얘기하기보다는 이런 것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방식이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예전에는 대본을 받으면 ‘이게 나였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로 접근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여러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거죠. 공감 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석원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건 어떤 건가요?
윤석원
: 이제 막 2달 된 쌍둥이를 키우고 있거든요. 밤에 잠을 못 자니까 와이프도 저도 죽을 것 같아요. 근데 그 조그만 애들이 살겠다고 밥 먹는 모습을 볼 때 제일 행복해요. 예전에는 술 먹을 때가 제일 행복했었는데. (웃음) 요즘은 무언가를 이뤄서 행복한 게 아니고 그냥 그 자체로 행복한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가 아직 돈을 아주 많이 벌거나 상을 받아본 건 아니지만, 돈도 많이 벌면 그것도 언젠간 나갈 거고 상도 죽을 때까지 계속 받을 건 아니니까 그런 행복보다는 내 아이 밥 먹을 때 느끼는 행복이 더 크지 않나 싶더라고요.

보편적으로 아이가 생기면 자신의 삶을 더 돌아보게 되던데 어떤 어른이고 싶어요?
윤석원
: 좋은 어른, 나이 드는 것 이런 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중에 멋있게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대화를 해보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있고, 뭔가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잖아요. 요즘은 멋있게 주름진 사람들이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그런 아우라는 공부를 한다거나 해서 만들어지는 건 아닐 것 같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주어진 대로 잘 살면 그런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을까. 일단은 내 자식들이나 와이프한테 피해나 주지 말자 싶은 마음도 있고요. (웃음)

피해요?
윤석원
: 아이를 뭘로 키울 거야, 라는 생각을 갖는 건 이 아이에 대한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애가 20세가 될 때까지 잘 키워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한 가지만 찾아주자. 제가 피해라고 말하는 건 그 나머지 것들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아요.

작은 것일수록 이루기 더 힘들다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윤석원
: 20대 때는 꿈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몇몇 일들을 겪으면서 장어농사를 짓자 싶었어요. 저는 배우로 빨리 돈 벌어서 배우를 안 하는 게 꿈이에요. 그냥 농사지으면서 애들 시집가면 사위들 불러다가 장어나 맥이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어차피 천억을 벌든 일조를 벌든 한 달에 이삼백을 벌든 행복은 자기 안에 있는 거니까 그냥 먹고살 수만 있으면 그게 행복한 게 아닐까.

봐둔 땅 있어요? (웃음)
윤석원
: 강화도요. 거기 땅이 되게 좋아서 순무가 나거든요. 민물장어 농사를 지을 건데 장어는 미네랄을 먹고 크니까요. 아하하하.




목록

SPECIAL

image SNS와 여성 연예인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