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민 “관객을 만나는 순간 그 자체로 살아 있게 되는 무언가가 있어요”

2016.04.06
“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서울요. 서울을 보고파요. 뭐가 사람을 변하게 했는지 그걸 보고 싶어요.” 공연을 보면서 연극 [환도열차]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대사가 있다면 이것이라 생각했다. [환도열차]는 2014년 서울 한복판에 60년 전 기차가 출몰하며 시작된다. 연극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한국전쟁 때 헤어진 남편을 찾는 것만이 희망인 지순을 통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찰한다. 한국인이 외국인과 한 팀이 되어 야구는 해도, 노숙인은 외면하는 곳. 먹고살 만해졌어도 옳은 말 대신 의뭉스러운 말만이 넘실대는 여전히 전쟁 같은 곳. 그러니 지순이 어렵게 찾은 남편이 60년 전의 그와 같을 리 없다. 김정민은 이 혼돈 속에서 모두를 비춰내는 거울 같은 지순으로 무대 중심에 선다. 지순을 제외한 모두가 2014년의 대한민국을 알고 있듯 지순은 외롭고, 옛날 사람을 그려내야 하는 배우는 더 외롭다. 그래서 물었다. 지금 괜찮은지.

지난번 프레스콜에서 “2년 사이 변화한 것 같았는데 또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김정민
: 초연 때는 감정적으로 관객들을 많이 휘감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저희가 떨어져 보는 쪽으로 노력을 많이 해서 예전 같은 느낌은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순 입장으로 봤을 때는 소소한 하나의 인간에서 출발해 이야기가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연습을 해보니 [환도열차]라는 작품에서 지순이 서사자라는 건 변하지 않더라고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극을 봐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김정민
: 이 부분은 제가 작·연출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부분인데요. 피난민을 태운 환도열차라는 소재나 지순이라는 인물은 감정적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그렇게 돼버리면 이야기가 갖고 있는 폭 자체가 작아질 수 있겠다 싶었어요. [환도열차]는 옛날 사람이 이 시대에 툭 떨어졌다는 소재를 가지고 옛것과 지금의 것을 충돌시켜 어떤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거든요. 그 부분을 존중하고 싶었어요. 사실 느끼는 그대로 연기하면 배우로서는 희열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이 덤덤한 톤이 관객에게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관객을 감정적으로 데려가는 것보다 인식의 전환을 시켜주는 공연이 좋은 공연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는 더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부분과 맞닿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요. 내러티브가 강한 장우재 작가의 희곡은 종종 배우가 그 이야기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김정민
: 그래서 연출님이랑 작업할 때 녹록치 않은 것 같아요. 연출님 작품들은 왠지 작가가 울면서 썼을 것 같은데 모든 작품에서 늘 표현은 그렇게 하길 원치 않으세요. 저도 어느 순간부터 연출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공연을 많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실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관객에게 선사하는 순간 배우가 빛날 수 있지만, 그런 공연은 많으니까요. [환도열차]는 초연 때 그렇게 해보기도 했고 감사하게도 이번은 앵콜이니까 다른 걸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런 작업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어요.

생각한 만큼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김정민
: 음… 모르겠어요. 관객들이랑 붙는 분위기가 일단 달라요. 다르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그게 어떻게 다르다는 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전의 뜨거운 느낌 대신 묵직한 소리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 소리가 결과적으로는 더 좋을 거라는 기대감은 어요. 이 다름을 스스로 인정하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관객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가 봐요.
김정민
: 우리가 아무리 애써서 연습을 해도 그중 몇 프로만 준비할 수 있고 나머지는 무조건 관객이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어제와 오늘 같은 연습을 반복한다고 해도 배우는 본능적으로 살아 있으려 하거든요. 하지만 그거 잘 안 돼요. 근데 관객을 만나는 순간 그 자체로 살아 있게 되는 무언가가 있어요. 그래서 연습 후반쯤이 되면 ‘이건 관객을 만나봐야 알 것 같다’고 내려놓는 시점이 생겨요.

아무래도 저는 객석에 있는 사람이다 보니 늘 궁금한 건데, 관객의 영향을 받는다는 건 어떤 건가요?
김정민
: 내가 정확하게 마음을 먹고 뱉은 대사에 어떤 반응을 준다는 거. 웃는 게 꼭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건 반응이거든요. 마음이 통한 느낌이에요. 관객들과 내 마음이 탁 합체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탄력이 붙어요. 진짜 공연이 잘 갈 때는 관객이 앉아서 우리를 보고 있지만 나랑 같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저는 관객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그런 게 진짜 많이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공연이 잘 안 될 때 몇십 배로 더 힘들기도 해요. (웃음)

관객의 그런 반응을 강하게 체험한 적이 있나요?
김정민
: 연출님도 늘 ‘나의 공연은 관객과 함께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거든요. 저도 늘 느꼈는데 작년에 [햇빛샤워]를 하면서 관객이 주는 힘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더 크게 들었어요. 정말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렇게 공연을 딱 열었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도 관객들이 그걸 정확히 이해해준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광자라는 여자가 갖고 있는 어떤 속성을 관객들이 흥미로워한 것도 있고 그게 작가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나머지 고민했던 부분은 관객들이 다 채워준달까. 극장에 오는 관객분들은 마음을 열고 오고 그걸 받아주는 사람들이 배우고, 그게 공연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마음이 열고 닫히는 건 전적으로 공연에 달려 있는 거죠.

[햇빛샤워]는 어떤 점에서 막막했던 거예요?
김정민
: 전과가 있는, 반지하에 살면서 새 인생을 꿈꾸는 광자의 폭풍 같은 마음이 엄청 상황을 뜨겁게 좌지우지해서 감각적으로 무언가를 초월하지 않으면 이 인물이 설득이 안 될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는 안 되더라고요. 또 하나는 광자가 너무 어두운 세상 속에 산다는 거였는데, 실은 이게 제일 컸어요. 배우인 내가 집중을 하면 할수록 어두운 생각을 한다는 것. 그 패배감을 계속 느낀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예를 들면 [환도열차]를 할 때는 농담으로라도 지순을 조심스럽게 대하는데, [햇빛샤워]를 할 때는 관객들도 저한테 질펀한 농담을 하시더라고요. 관객은 캐릭터와 배우를 같이 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지만 기분이 되게 묘했어요. 그래서 연기가 힘들었다기보다는 그런 멘탈적인 부분이 그랬어요. 아후 너무 그렇다, 이런 생각 진짜 많이 했거든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환도열차] 이후 [햇빛샤워]를 바로 하게 되는데, 지순과 광자는 너무 극과 극의 여자들 아닌가요.
김정민
: 제가 조금 고된 부분은 있으나 그건 행복한 비명 같고요. 솔직히 여배우들이 전면에 나오는 공연이 많지 않은데 그런 공연을 하고 있고, 그 두 캐릭터가 서로 다르다는 건 너무 감사한 부분이죠. 기본적으로 그 인물이 가진 생각을 따라가야 한다고 접근하는 편이라 본의 아니게 제 안에서는 확실하고도 충분히 캐릭터에 영향을 받는 편이긴 해요. 근데 묘한 게 끝나면 정말 빨리 잊어버리거든요. 가끔 인터뷰에서 그때 했던 대사 조금만 해달라고 하실 때가 있는데 진짜 기억이 잘 안 나요.

하지만 두 여자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빼앗아간다는 점이 비슷하면서도 슬픈 부분이잖아요.
김정민
: 오늘 전철을 타고 오면서 갑자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지순이나 광자나 세상에 패배를 느끼고 어딘가로 다 떠나요. 제가 너무 불행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자꾸 왜. 게다가 이런 인물을 연이어 하게 되면 그래도 어느 한쪽은 승자가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뭔가 작가님 세계관 안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전제 같은 게 깔려 있나 봐요. (웃음)

[환도열차]의 지순이 떠나는 곳은 어디라고 생각해요?
김정민
: 초연 때는 “죽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요. 우리가 사는 지금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해서 총 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로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되냐는 반응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에는 지순이 돌아가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결국은 그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좋은 곳, 사람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 아닐까요.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사회는 좋은 사람을 죽이는 세상 같거든요. 다른 유토피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이라는 건 좋은 사람들이 좋은 얘기를 하고 그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곳 아닐까요.

2014년의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자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지순은 어떤 사람일까요.
김정민
: 한동안은 서사자라는 게 살짝 스트레스도 받았는데 나를 드러낼 여건이 안 되니까 그럼 이걸 적극적으로 인정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뭘까 생각해보면 너무 다른 사람들 얘기를 많이 해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나는 어쨌다가 별로 없어서. (웃음) 근데 그렇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지순은 정 많고 따뜻한 여자겠죠. ‘눈이 마음에 달린 여자’라는 게 지순한테는 제일 구체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도 직설화법을 쓰는 사람이 있고 이야기로 만들어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순은 후자구나. 그런 걸 보면 지순은 이야기라는 것에 푹 빠져 있는 사람 아닐까.

지순이 얘기만 따로 봤으면 좋겠어요.
김정민
: 저도요. 혼자서 계속 남 얘기만 하고 있는 지순이 안쓰러워서 이걸 영화로 찍으면 어떤 장면이 나올까 상상해본 적도 있어요. 맹하고 바보 같은 모습도 있지만, 부산으로 피난 와서 죽 팔 때는 억척스러운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 시장에서는 어떤 사람들이랑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 지순을 도와주던 석홍이랑은 솔직히 지금으로 치면 ‘썸탄 거지 뭐야’ 이러거든요. (웃음) 그랬을 때 엄청 수줍어하면서도 고백받고 안 된다고 응수했을 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을까. 만약에 인물로만 들어가서 지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면 참 재밌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작가가 넣으려는 이야기, 연출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것들을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만든 세계를 강하게 지지하는 편인가 봐요.
김정민
: [환도열차] 중 사당패 부부가 언 강에 빠졌는데 강 밖 사람들이 사당패가 춤추고 논다고 얘기하는 대사가 있어요. 훌륭한 은유거든요. 제가 연출님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에요. 그런 대사를 창작극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지순의 대사는 대부분 은유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부분에서 지순이 서사자라는 것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죠.

그런데 오늘 얘기하면서 인정한다거나 내려놓는다는 얘기를 많이 하시네요.
김정민
: 충분히 감정적인 사람이라 욱해서 싸우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근데 되게 신기한 게 뭔가 일이 탁 터지거나 감정이 딥하면 딥할수록 빠져나오게 되더라고요. 스스로 그게 훨씬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근데 내려놓자, 라는 말을 숙제처럼 하지만 내려놓는 게 어딨겠어요. (웃음) 다만 그렇게 되려고 나를 컨트롤한다는 것뿐이지.

2년 전 [연극in] 인터뷰에서 소속되어 있는 극단 이와삼에 대해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는데 지금은 장우재의 빛이지 이와삼의 성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라고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냉정한 편인가 봐요. (웃음)
김정
: 제가 되게 냉정한 얘기 많이 해요. 누구 편에 서서 얘기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올 때 누군가는 팔이 안으로 굽는 태도로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밖에 있는 사람처럼 얘기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그걸 공정하게 이 부분은 이렇게 되는데 이건 이런 것 같다고 얘기하니까 연출님이 좋아하시기도 하고 얄미워하시기도 해요. (웃음) 그냥 제일 좋은 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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