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산나 “작고 소소한 감정들을 연기하는 게 더 편하고 재밌어요”

2016.02.24
벤치에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여자가 용기를 내 사랑을 고백하자 남자 역시 그 마음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점점 가까워져 오는 그녀를 향해 “지구가 공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여자는 떠나고, 이후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여덟 커플이 등장해 얘기하고 고민하고 싸우고 울고 웃는다. 그리고 다시 벤치. 그렇게 돌고 돌아 벤치에 앉은 여자를 향해 남자는 미소를 짓는다. 연극 [올모스트 메인]은 아홉 개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통해 기쁨과 슬픔은 다르지 않고, 사랑이란 그 모든 복잡미묘한 감정의 집합이라는 단순하지만 가장 섬세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감정 자체에 집중하고, 사랑과 관련된 보편적인 상황들이 펼쳐져 모두 쉽게 [올모스트 메인]에 마음을 빼앗긴다. 노수산나는 이 안에서도 가장 감정의 폭이 깊은 세 인물을 연기한다.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여자. 하지만 기쁨 곁에 바로 슬픔이 있듯, 차분한 캐릭터 바로 옆에 쾌활한 노수산나가 있었다.
 

[올모스트 메인]을 대학교 졸업공연으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노수산나
: 6년? 7년 전이니까. 히익. 말도 안 돼! (웃음) 결혼식 전날 우연히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는 ‘Sad and Glad’랑 친구였던 두 남녀가 연인이 되는 ‘Seeing the Thing’ 두 편을 했었어요. ‘Sad and Glad’는 지금도 하고 있는 장면이거든요. 그때는 ‘전 남자친구를 맞닥뜨리다’에만 머물러서 당황스러움이 컸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연습할 때부터 그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공존하는 어떤 말도 안 되는 편안함, 그 당시 좋았던 추억,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은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느껴지더라고요. 겉으로는 잘 안 보일 수도 있는데 뭔가 좀 더 다이내믹해졌다고 해야 할까. 장면마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세월이 흘렀죠.

‘Sad and Glad’의 샌드린과는 달리 ‘Seeing the Thing’의 론다는 와일드한 여자로 설정되어 있잖아요. 외형적으로 보이는 성격이 극과 극인데 어떻게 그 장면을 하게 됐었어요?
노수산나
: 제가 어렸을 때는 론다나 [너와 함께라면]의 둘째 딸같이 외향적이고 왈가닥인 역할을 더 많이 했었어요. 아니면 아예 센 캐릭터나. 스물아홉 서른 요 근래 2~3년간 되게 조용한 역할을 많이 했는데, 특히 (민)준호 오빠랑 하면 더 그래요. 준호 연출님이 저를 되게 여성스럽고 조용한데 강단 있는 사람으로 보나 봐요. 아하하하. 며칠 전에 차이무 선배님들이 보러 오셔서 그러시더라고요. “조용한 것만 맡아서 근질근질하겠다?” (웃음) 원래 성격이 좀 털털해서 약간 답답할 때도 있는데 그냥 전 여기서 감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올모스트 메인]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모두 사랑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다루잖아요. 어떤 식으로 접근을 했나요?
노수산나
: 트리플 캐스팅이라 같은 장면을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연습도 연습이었지만 이 두 인물이 어떤 상황에 있고 어떤 마음에서 이런 말들을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배우가 18명인 데다 장면마다 만나는 배우들이 달라서 그 조합까지 따지면 굉장히 다양한데, 공연 일주일 전에도 런 돌다가 팀별로 다시 얘기하고 그랬어요. 연출님 앞에서 제대로 맞춰보지 못한 조합도 많은데 계속 얘기하자니까 이거 어떻게 하지 싶을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나요?
노수산나
: ‘Story of Hope’는 호프라는 여자가 긴 시간 동안 헤매다 진짜 사랑이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가서 보니 그 사람이 작아졌어요. 쉽게 상상하기도 어렵고 짧은 장면에 비해 갖고 있어야 하는 감정도 너무 큰 에피소드예요. 이런 경우에는 이야기 자체에 빠져 있으면 거기에 갇혀버리는 수가 있어서 아예 다른 상황에 비유해서 생각해봤어요. 죄책감이 많이 들었던 일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열심히 얘기했는데 알고 보니 상대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3년간 가출했다가 집에 와서 “엄마, 미안해. 이제 정신 차리고 살게” 이렇게 얘기하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전혀 모르는 아저씨였다 같은 거. 작품에 나오는 대부분의 장면이 기쁨이나 희망으로 끝나는데, 그 전에 다 고통이 있어요. 기쁨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르고, 그걸 겪어야 기쁨과 희망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고통에 더 많이 집중했어요.

그럼 ‘Sad and Glad’에서의 고통은 어떤 건가요?
노수산나
: 여자 입장에서는 지미가 인생의 마지막 남자라 생각하고 만났을 거고, 사실 속으로는 계속 결혼을 하고 싶었을 거예요. 근데 이 남자는 그때가 아니라 헤어지고 나서 샌드린이 진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게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 같아요. 예전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이제 와서 이러니. “같은 동네 살면서 왜 7달 동안 못 봤지?”라고 묻는데 그건 내가 피해 다녀서 그런 거거든요. ‘Sad and Glad’는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예요. 샌드린은 다른 장면에 비해서 말이 많지 않지만 대신 이 여자의 속에서 벌어지는,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다 고통이에요. 다행히도 차이무 선배님들이 무대의 황량함도, 신마다 배우들이 장기를 부리는 게 아니라 인물의 관계와 상황이 쫀쫀하게 보여서 좋았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고 가셨어요. 연습한 것들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았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라 관객 집중력도 높죠?
노수산나
: ‘Story of Hope’에서는 종종 우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소리들이 들리면 조용히 숨죽여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 지켜보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따뜻해져요. 관객들이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과 에너지들이 막 느껴지는데,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큼 본인들의 경험이라고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 더 좋아요. 장면들이 짧아서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데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들리니까 더 분위기가 잡히기도 하고요.

장면이 대부분 2인극이라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어요.
노수산나
: 배역마다 기본 노선을 공유하지만 배우의 색이 묻어나니까 확실히 다 달라요. ‘Sad and Glad’에서 (박)성훈 오빠랑은 핑퐁이 너무 잘 돼서 재밌어요. 완전 ‘인생캐’예요. 어떻게 그 잘생긴 얼굴이 하나도 안 보이게 찌질하게 잘하는지. (조)풍래 오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여서 안쓰럽고, (주)민진 오빠는 붙잡고 싶어 하는 눈 때문에 안타까워요. ‘Story of Hope’의 경우 (성)열석 오빠의 대니는 되게 차가워서 더 뻔뻔하게 변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줘요. (임)철수 오빠(강)기둥이는 여자에 대한 미련과 아픔과 사랑하는 마음이 막 눈에서 보여요. 얼마 전에 철수 오빠랑 오랜만에 했는데 “안녕 호프. 음 괜찮아” 이러고 웃는데 너~무 미안해서 미치겠는 거예요. 그날 엄청 울었어요.

배우 1인당 3~4명의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데, 더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가 있나요?
노수산나
: 호프요. 어려워서 더 많이 공들인 것도 있고, 감정이 너무 커서 매번 무대 나가기 제일 부담스럽기도 해요. 때에 따라서는 이 여자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 그 마음을 잘 얘기하고 싶은 마음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올모스트 메인]은 옴니버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장면과 인물들이 미묘하게 연결되는 작품이잖아요. 특히 프롤로그에서 헤어졌던 두 남녀가 에필로그에서 다시 만나면서 그 사이의 이야기들이 마치 그 두 남녀 사이에 벌어졌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결국 그렇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인연이라는 게 있다고 믿나요?
노수산
나: 있겠죠. 내게 딱 맞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호프 같은 상황을 겪는 친구가 있었어요. 몇 년 동안 못 잊고 내 사랑은 그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인생의 마지막 사랑은 그 사람이다 해서 결국 갔거든요. 다시 만나요. 옆에서 그런 것들을 보다 보면 인생에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지나갔건 아직 오지 않았건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타이밍이 잘 맞아서 잘 이어지면 그것도 엄청난 행운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것도 인연일 것 같고요.

배우를 떠나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 와 닿는 장면이 있나요?
노수산나
: 사실 대부분의 장면에 공감하지만, 가장 와 닿는 건 ‘Her Heart’요. 사랑에 실패하고 심장이 여러 개로 쪼개져서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상대방이 그걸 고칠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 장면이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노래 같은 느낌이에요. 지난 사랑 때문에 성숙해져서 다음 사랑을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 내가 가진 아픔을 같이 어루만져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그 마음에 너무 공감이 많이 됐어요.

[우리 노래방에서 얘기 좀 할까]부터 [썸걸즈], [올모스트 메인]까지 최근 유난히 사랑과 관련된 작품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노수산나
: 어릴 때는 너무 어리게 생기고 주변에서 계속 어리다 어리다 그래서 ‘내가 과연 20대 여자 연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스물일곱 때까지 했어요. ‘나도 20대 여자 역할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계속 했는데 그 소망을 지금 이루고 있는 거죠. (웃음) 이제 좀 알겠구나 싶을 때 이런 작품이 들어와서 더 끌렸던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요즘엔 드라마나 영화도 조금씩 하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쪽에서도 로맨스를 해보고 싶어요.

로맨스에 대한 어떤 애착이 있나 봐요. 
노수산나
: 꽁냥꽁냥하니 재밌잖아요. (웃음) 그리고 아마도 다른 장르에 비해 일상적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작고 소소한 감정들을 연기하는 게 더 편하고 재밌어요. 스릴러 같은 건 엄청나게 다른 상상력을 가져야 해서 그것도 재밌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연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전 한 번 겪어봤던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 더 좋나 봐요. 작품도 스펙터클이 있는 것보다는 우리네 일상 이야기 이런 것에 더 잘 꽂히고 감정이입해서 보거든요. 영화로 따지면 홍상수 감독님 영화, 드라마로는 노희경 작가님 드라마 같은 느낌?

그런 연기야말로 디테일이 생명이잖아요.
노수산나
: 제가 줄리안 무어를 엄청 좋아해요.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그때마다 극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섬세한 감정 표현을 하거든요. [디 아워스]에 줄리안 무어가 화장실에서 우는 장면이 있어요. 밖에는 남편이 있고,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얘기를 하는데 그 장면이 엄청 섬세하거든요.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도 그래요. 전화를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전화가 왔을 때 빨리 받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 말하는 그 목소리 톤. 엄청 순간이지만 많은 것을 얘기하거든요. 그런 섬세함을 따라가고 싶어요.

스스로 생각하는 섬세함의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어느 정도 하는 것 같아요?
노수산나
: 아직 뭐 반 하고 있겠죠. (웃음) 따라갈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치열해야 되는데 어느 순간 타협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최종 목표는 아까 말했던 것 같은 정말 엄청난 섬세함이거든요.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력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감정을 갖고 움직이는 역할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요. 서른다섯 넘어가야 좀 더 알게 될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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