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 걸]과 [캐롤]이 내게 가르쳐준 것

2016.02.22
* 영화 [대니쉬 걸]과 [캐롤]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 [대니쉬 걸]의 주인공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는 아내 게르다 베게너(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작업을 돕기 위해 여자 옷을 걸쳐본 것을 계기로 자기 안의 여성을 자각한다. “그날 이후 무언가가 달라졌어”라고. 릴리라 이름 붙인 자기 안의 여성과 에이나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혼돈에 빠진 그는 여러 의사를 찾지만 1920년대의 학술 언어는 그의 경험에 잘못된 이름만을 붙인다. 누군가는 호르몬 이상이라며 방사선 치료를 하고, 누군가는 성도착증이라며 입원시키려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동성애라 말한다. 모두의 말이 빗나갈 때, 비로소 에이나르만이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인 명제로 제시한다. “나는 내가 여자라고 생각해요.” 남성의 몸으로 태어난 여성이라는, 당시 사회의 해석 지평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 세상에 균열을 내고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대니쉬 걸]이라는 영화를 통해 헤테로섹슈얼 남성 관객이 경험하는 균열의 순간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바로 나와 같은.

에이나르, 아니 릴리는 수술을 통해 여성으로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신의 실수를 돌려놓은 것”이라고 답한다. 적어도 영화 속의 그는 제3의 성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여자가 되길 원했다. 그렇다면 그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옹호해야 옳은가, 기존 관념 안에서의 여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더 온전한 주체로 대하는 방식인가. 성소수자를 혐오하지 않는 것만으로 이 이슈에 대해 깨어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대니쉬 걸]을 보며 성 정치학에 대한 나의 무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트랜스섹슈얼의 기본적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들만이 가진 구체적 욕망이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이것은 차라리 배움에 가까운 경험이다. [대니쉬 걸]과는 장르도, 정서도 전혀 다르지만 영화 [캐롤]을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 그래서다. 두 여성인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러브스토리는 동성애가 이성애자들이 인정해줘야 하는 무해한 일탈이 아닌, 누가 봐도 황홀한 사랑의 양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고전에서 드러나듯, 사랑의 강렬함과 절대성은 사회적 터부를 극복하는 서사를 통해 더욱 명료해진다. 동성애에 대해 윤리적 문제 운운하며, 여성은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그럼에도 오직 이 사람이어야 하기에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도 가능한 두 여성의 확신은 레즈비언 로맨스도 인정해달라고 항변하는 대신, 레즈비언 로맨스이기에 아름다운 구체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두 작품이 자각시켜준 것은 무지만이 아니다. 비평에 있어 무지는 분명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무지를 인식하지 않고도 이들에 대해 비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의 디테일한 차이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한 인간의 보편적 용기와 승리라는 관점으로 [대니쉬 걸]을 비평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모르던 어떤 삶은 보편이라는 개념과 함께 쉽게 번역된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어렵지 않기에 할 수 있다고, 해도 된다고 믿는 것. 여기엔 자신의 지평 너머를 확인할 이유가 별로 없는 헤테로 남성의 권력이 밑에 깔려 있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캐롤]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트는 지적이고 많은 경우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호모포비아는 결코 아닌 남성 비평가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쉬운 실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논란이 된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고 캐롤이 필요한 거다. 그런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란 말에서 그 스스로 후회한 “하필이면”이란 말을 빼더라도 이 해석은 이성애자의 질서를 디폴트값으로 잡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논란 이후 블로그를 통해 “테레즈의 변화가 그녀의 정체성과 관련한 동성애 자체의 고유성 때문인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랑의 전인성 때문인지는 사실 이 영화에서 명확하지 않”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했지만, 우리는 이성애자 로맨스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에 대해 작품 안에서 명확한 설명이 없더라도 그것이 이성애 자체의 고유성 때문인지 사랑의 전인성 때문인지 분리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캐롤]의 장면 장면을 성실하고 섬세하게 해석하지만 그 해석을 위한 자신의 인식적인 지평을 점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배움은 순조롭게 자신이 발 디딘 해석의 지평을 좀 더 단단히 다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또 어떤 배움은 발밑의 지평을 무너뜨리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내게 [대니쉬 걸]과 [캐롤]을 본다는 것은 후자의 의미다. 이 두 텍스트를 통해 만난 낯선 삶의 풍경은 내가 대상에 투영하던 보편타당함이 헤테로 남성의 질서 위에서의 보편성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이것은 말하자면 천동설의 시각으로 보던 하늘을 어느 순간 지동설의 시선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별의 풍경은 똑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선 지평이 절대적인 기준이라 생각하며 저 모든 별을 객체로 보는 것과, 내가 선 지평이 유동적이고 움직이는 저 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별을 보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진정 성실한 비평이란 내가 움직이는 행성 위에서 관측하고 있다는 자각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세상은, 그렇게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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