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티파니 연출가 “공연은 언제나 ‘지금’을 얘기하는 게 맞다”

2016.02.03
존 티파니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연출가 중 하나다. 스코틀랜드의 이라크전 참전용사 이야기를 다룬 [블랙 워치]는 수많은 상을 휩쓸며 20개 이상의 도시에서 공연되었고, 동명영화를 원작으로 한 [원스] 역시 8개의 토니어워즈 트로피를 안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등의 고전을 비롯해 현재는 J.K.롤링과 [해리포터]의 새로운 시리즈를 연극으로 제작 중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상대로 공연을 만드는 그가 최근 한국에 소개한 연극은 [렛미인]. 뱀파이어 소녀와 인간 소년의 사랑에 집중했던 영화는 존 티파니의 손을 거치며 훨씬 더 넓은 의미의 외로움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됐다. 서늘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한 무대, 긴장감과 부드러움을 담은 음악, 말 대신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움직임. 그야말로 [렛미인]에는 그의 영업비밀들로 가득했다.
 

[렛미인]의 비영어권 프로덕션이 처음이라 알고 있다. 관객을 만나 보니 예상치 못한 반응이 있었나.
존 티파니
: [렛미인]은 스코틀랜드·런던·뉴욕에서 공연을 했고, [블랙 워치][원스]도 많은 나라에서 공연됐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문화권을 떠나 인간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웃게 하는 것, 울게 하는 것, 깜짝 놀라서 뛰게 하는 것들. 그런데 프리뷰를 보니 관객들이 웃긴 웃었는데 웃어도 된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 놀랐다. 한국에서는 희극과 비극의 대조가 심한 걸까? 물론 [렛미인]은 어둡고 외롭고 무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웃어도 되는 이야기다.

[원스]에 비하면 [렛미인]은 대중과의 접점이 더 적은 작품이다. 박소담이 캐스팅되긴 했지만 배우들의 경력이 길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다.
존 티파니
: 일라이와 오스카는 모두 어린아이로 설정되어 있어 체격 같은 외형적 조건까지 유심히 봐야 한다. 캐스팅이 쉽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훌륭한 배우고 매우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게 너무 좋다. 각 배우들을 동물에 비유해서 보고 있는데, (오)승훈은 100% 강아지이고 소담은 고양이, (이)은지는 새, (안)승균은 굉장히 영리한 다람쥐 같다. 지금 나는 마치 아이가 학교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걱정하는 엄마 같다. (웃음) 경력들이 많지 않아서 되게 무서울 거거든.

뱀파이어인 연인과 긴 세월을 보내며 인간사냥꾼이 되는 하칸이야말로 캐스팅하기 어려운 배역 아니었나.
존 티파니
: 제작사에서도 하칸 캐스팅을 가장 걱정했다고 들었다. 복잡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연기력에 50대라는 나이대도 그랬지만, 몸을 많이 쓰는 작품이라 웜업만 2시간이 소요되는 이런 방식의 작업을 흔쾌히 할 배우가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주진모 선생님이 직접 지원을 했다고 하더라. 얼마나 대단한가. 무대 위에서도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 공연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뉴욕에 라마마라는 굉장히 실험적인 극단이 있는데, 젊었을 때 거기서 몇 작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배워야 할 게 더 많은 분이다. 나도 그처럼 나이 들고 싶다.

공연을 보면서 연극 [렛미인]은 ‘하칸 프리퀄’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소설이나 영화에 비해 하칸의 비중이 늘어난 이유는 뭔가.
존 티파니
: 사실 소설에는 하칸과 오스카 사이의 사이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스웨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약간 보이고,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하칸과 일라이가 어릴 때 찍은 사진이 정확하게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하칸과 오스카의 순환이 흥미로웠고, 그 이야기에 관심이 생겨 [렛미인]을 올리게 된 거다. 오스카-일라이-하칸은 마치 트라이앵글 같다. 오스카가 일라이와 살면서 경험하게 될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칸과 일라이의 과거가 어땠는지 알아야만 했고, 하칸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진모 선생님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해서 다른 나라에서의 공연보다 한국의 하칸이 더 도드라지는 면이 있다. 무대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을 안 해도 계속 눈이 그쪽으로 가게 되니까.

숲으로 구현된 무대를 두고 ‘통과의례’라는 얘기를 했다. 성장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존 티파니
: 연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동화에 굉장히 심취했었다. [헨젤과 그레텔], [신데렐라] 등 동화 속 인물을 통해 아이들을 분석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독특함에 굉장히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고. 사실 어떤 나라, 어떤 문화권이던 소년소녀 시절은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감정이 풍부한 시점이다. 공연이라는 게 변화나 변신을 주로 다루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 혹은 몸만 성장한다는 것 같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렛미인]은 흡혈귀를 통해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면에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인지 오스카를 살피는 선생님과 사탕가게 주인, 오스카를 방치하는 부모를 통해 어른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존 티파니
: 그들 역시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라 자작나무 숲과 눈까지 합쳐지면 그 풍경이 굉장히 애잔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어른들은 의도치 않게 자신이 가진 슬픔이나 실패를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어른들이 너무 일찍 앗아가 버린다는 생각도 들고. 사실 나도 내가 세상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닐 때가 있어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어른들은 아이들이 좋은 어른으로,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잘 보호해줘야 한다.

하칸 역의 주진모를 닮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이 부러운가.
존 티파니
: 사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게 있고, 나도 강아지처럼 주인님을 기쁘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웃음) 그런데 그는 땅에 깊숙이 뿌리박은 사람처럼 항상 묵직하고, 뭔가가 안에 담겨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습 끝나고 노트를 주면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네” 한마디 하고 간다. 스스로 생각 중인 거지. 그런 침착함이 너무 부럽다.

공연 초반에는 모든 게 빠듯하고 예민할 시기일 텐데도 유쾌한 편인 것 같다.
존 티파니
: 이 일은 너무 사랑스러운 일이잖아. 난 운이 정말 좋은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서울처럼 좋아하는 곳에 올 수 있고, 커피 사주는 사람들도 있고. (웃음) 물론 공연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부담감도 엄청나다. 하지만 이 일은 너무 좋은 일이라는 걸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내가 만든 공연이 서울, 시드니, 뉴욕까지 초대받아서 공연된다는 것이 굉장히 영광스럽다.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상대로 공연을 하고 있는데 각기 다른 문화권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있을까.
존 티파니
: 되게 겸손해지고 흥분된다. 비행기 타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집에서 TV나 보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웃음) 그런데 공연이라는 건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내면을 빨리 깨닫게 해주는 장르라 더 좋다. 불과 10분 전 작품을 손보는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올려 보면서 얘기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만약 내가 그냥 관광 온 사람이라면 그걸 어떻게 알았겠나. 일을 하면서 각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더 좋은 스토리텔러가 되는 것 같다.

존 티파니 표 작품이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 이유는 음악과 움직임이라는 비언어적 요소의 활용 때문이기도 하다. 뮤지컬이 아님에도 그 요소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있나.
존 티파니
: 작품을 연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하라’는 점이다. 조용히 하라는 사람 없이 공연 하나만으로 관객이 조용해지도록 만드는 것. 나는 그걸 음악과 비주얼을 통해 구현해내는 편이다. 비주얼의 경우엔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닌,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필요하다. 평소에도 원세트를 주로 쓰지만, 실제 자작나무로 만든 [렛미인] 무대는 가만히 앉아서 며칠간 봐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세트다. 음악의 경우엔 공연과 어울리는 작곡가를 찾아내는 게 제일 첫 번째일 정도로 굉장히 중요하고.

개인적으로는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유려한 스트링의 오프닝곡이 참 좋았다.
존 티파니
: 올라퍼 아르날즈의 ‘Old Skin’이라는 곡인데 너무 좋지. ‘Sudden Throw’라는 곡도 너무 좋아서 이미 대본을 받은 상태였지만 곡에 맞춰 엔딩을 구상할 정도였다. 작곡가가 우리 공연을 너무 좋아했는데, 사실 그런 곡을 쓰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만하지. (웃음)

[블랙 워치], [원스], [렛미인]까지 함께 작업하고 있는 무브먼트 디렉터 스티브 호겟과는 오랜 친구 사이라 들었다. 
존 티파니
: 함께 MTV를 보고 자랐고, 콘서트도 같이 가고, 음악도 공유하는 30년 된 사이다. 나는 의사가 되려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학교를 갔고, 스티븐은 웨일즈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배우고 있었다. 둘 다 대학에서는 공연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각각 다른 장소에서 어쩌다 공연과 인연을 맺게 된 거다. 이게 재밌는 게 웨일즈는 피지컬을 중시했고, 당시 스코틀랜드는 극작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스티븐 공연을 보러 가면 “야 너네 대사 하나도 안 들려, 왜 이렇게 웅얼거려”라고 했고, 스티븐은 내 공연 보러 와서 “너는 춤 좀 춰야겠다” 이랬었다. 둘이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웃음)

덕분에 관객들은 기존의 문법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의 공연을 보게 됐다.
존 티파니
: 수년간 파티나 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공연연출가라는 것을 들으면 “나도 공연 보고 싶긴 한데”라고 말한다. 이 말이 나에게는 “교회 가긴 가야 되는데”처럼 들렸다. 다들 공연을 어렵게 생각하는 거다. 공연은 관객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예술의 형태를 조합하는 게 좋다. 앞으로는 ‘공연연출가’라는 말에 “나 공연 보는 거 너무 좋아해요!! 봐도 봐도 너무 재밌어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다.

공연을 어려워하는 건 한국이나 영국이나 비슷한 것 같다.
존 티파니
: 영국에는 오래된 극장들이 많아 그 안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샹들리에, 카펫 이런 것들이 무겁게 누르니까. 가끔 젊은 친구들이랑 그런 오래된 극장에서 워크숍을 할 때가 있는데, 그 장소가 편안해져야 작업이 가능하니까 막 뛰고 노래하고 소리 지르게 한다. 그럼 보수적인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도 하지만. (웃음) 요즘은 뉴욕에서도 꽤 작업을 하는데 브로드웨이는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원스]나 [렛미인]에서도 그렇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이게 실제 방이라고 하지 않는다. 2013년에 브로드웨이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연출한 적이 있다. 그때도 프로듀서들이 이건 성경책을 찢는 거랑 같은 의미라며 테네시 윌리엄스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걱정을 했다. 난 할 수 있다 그랬지. (웃음) 그런데 생전에 그를 알았던 분들이 말해줬다. 이 공연을 테네시 윌리엄스가 그 당시에 봤다면 안 좋아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좋아했을 거라고. 공연은 언제나 ‘지금’을 얘기하는 게 맞다.

그게 고전이 꾸준히 공연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존 티파니
: 난 셰익스피어를 너무 좋아하는데,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서 올려지는 셰익스피어 공연이 유럽에서 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좋은 게 있다. 영국에서는 대사들을 다 고치지 않는 이상 고대 언어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다들 지루해한다. 하지만 비영어권에서는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선하게 받아들여진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그를 근엄한 사람처럼 표현하지 않나. 만약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거 아니야!’라고 했을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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