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낮은 데로 달려온 ‘파워수수’ 걸 그룹

2016.02.01
걸 그룹 여자친구는 ‘오늘부터 우리는’ 뮤직비디오에서 한옥 민박집에서 수박을 나눠 먹고,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곳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시간을 달려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걸 그룹이 서울에서 로케 촬영을 하는데, 강남도 홍대도 아닌 중앙선 국철 역과 한강 철교를 담는 것이다. 아이돌 뮤직비디오에 숱하게 등장하는 학교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노란 화물 열차가 보이는 국철 옥외 역이나, 흐린 날의 한강 다리, 한강 철교 북단 둔치가 원래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버스 정거장 뒤로 펼쳐진 야산 역시 나무가 듬성듬성하고 흙이 다 보이는, 그러나 딱히 폐허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시시한 그냥 뒷산’이다. 여자친구의 뮤직비디오들은 예쁘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은,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조차 않는 곳들을 굳이 찾아간다.

‘시간을 달려서’ 뮤직비디오는 곳곳에서 일본의 영화감독 이와이 슌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그가 졸업을 소재로 AKB48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 있기 때문이기도, 교복을 입고 발레를 하는 장면이 [하나와 앨리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을 달려서’는 소녀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평범한 일상의 공간을 가능한 한 예쁘게 담았다는 점에서 이와이 슌지의 세계와 공통점을 가진다. 버스 정거장에서 곰 인형이 쓰러지며 소녀가 달리는 장면은 ‘시간을 달려서’와 관련된 기획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 한국의 아이돌은 최대한 근사한 세트 속에서 근사한 옷을 입고 근사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근사한 유사 인간이다. 그들은 육체의 옷을 입은 이상화된 인물이고, 실력과 퀄리티가 중시되는 K-POP에서는 더욱더 어떤 면으로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면을 갖출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아이돌은 진정 ‘이웃집 소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바로 이것을 하고 있다. 익숙한 여고생 판타지에 그쳤던 ‘유리구슬’과 이후의 작품들이 판이하게 다른 것도 이 지점이다. 이들은 예쁘게 담겼을 뿐, 시시한 공간에서 비장하게 열심히 뛴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여자친구를 수식하는 말이 된 ‘파워 청순’의 ‘파워’는 이 순간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뭔가를 위해 있는 힘껏 애쓰는 사람에게는 동경보다는 연민이나 공감이 작용한다. 여자친구는 신비롭고 멋진 소녀가 되기는커녕, 구질구질해지기 직전까지 수수해진다. ‘파워’는 이 수수함을 통해 새로운 옷을 입는다. 평소에 기가 센 소녀들은 아니지만, 애타는 감정 때문에 힘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화제를 일으킨 ‘8번 넘어지는 무대 영상’은 그래서 여자친구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완벽하고 멋진 소녀들이라서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저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아이돌의 탄생이다. 카라가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생계형 아이돌’이란 호칭을 받은 이후, 치밀한 기획과 미학적 콘셉트를 통해 ‘수수함’을 아이돌의 무기로 삼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돌은 팬들에게 반말을 듣고, ‘챙김’을 받는다. 그만큼 아이돌의 위치는 더 낮아지는 흐름 속에서, 여자친구는 지금 아이돌이 취해야 할 멋진 해답을 찾아냈다. 여고생에 대한 판타지와 ‘청순’ 콘셉트 안에서, 그들은 ‘파워’를 바탕으로 한 수수함을 설득했다. ‘시간을 달려서’를 통해 ‘학교 3부작’에서 졸업을 맞이한 여자친구에게, 아마도 그들이 교복을 벗은 뒤는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편의점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아이돌이 성립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혹자는 ‘시간을 달려서 재입학’ 할 것이라는 농담도 한다. 다만 지금 점쳐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여자친구의 다음 시험은 아이돌 업계의 리트머스지도 될 것이란 점이다. 부담 없는 친숙함이란 가치를 아이돌이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법론으로 가능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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