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림 “공연을 하면서 실제의 나와 직면할 때가 있어요”

2016.01.13
어린 아들을 잃은 후 16년간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가 있다. 엄마는 잘 자란 아들의 환영을 보고, 딸은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며, 아빠는 이 위태로운 가정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운다. 하지만 엄마는 이 상처를 이해하고 싶고, 딸은 부모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며,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놓고 쉬고 싶다.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은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을 이해하는 핵심 정서다. 살아 있는 다이애나와 댄, 나탈리가 의식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한다면, 집 안 곳곳을 뛰어다니는 게이브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2011년 초연에 이어 다시 돌아온 최재림은 살아 움직이는 무의식으로 게이브를 그린다. 협박과 회유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를 흔들어 깨우는 게이브 덕분에 이 위태로운 가족은 전진을 위한 한 발을 내디딘다. 시원한 발성으로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최재림 게이브의 노래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상자 안을 보세요, 물건을 꺼내세요.”


* 본 기사에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넥스트 투 노멀]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굉장히 좋아했고, 꼭 하고 싶은 작품으로 꼽기도 했었잖아요.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요?
최재림
: 아무래도 처음은 음악이죠. 음악이 그 자체로도 너무 좋은데 대본이 원하는 흐름과 인물의 감정이 음악에 잘 붙어 있었어요. 사실 이 공연이 화려하거나 어마어마한 기술력으로 움직이는 작품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쭉 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극에 나오는 인물도 모두 다 매력적이고. 무대도 어떻게 이렇게 참 세련되게 만들었을까 싶었죠.

대본과 음악이 잘 붙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최재림
: 초반에 다이애나가 약을 그만 먹기로 결심하고 2주 후 가족들이랑 저녁 식사를 해요. 그때 ‘좋아질 거야’가 짠짠짠짠 빠른 템포로 나와요. 관객들은 모든 게 괜찮아지고 있고 이 가족에게 어떤 행복한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하죠. 그런데 ‘그 아인 없어’가 나오면서 음악이 갑자기 180도로 전환이 되거든요. 아들의 환상을 보는 다이애나에게 아들이 죽었다는 얘기는 굉장히 어리둥절하죠. 그래서 음악도 서정적으로 슬픔의 감정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댄도 덤덤하게 상황을 알려주는 정도에서 그쳐요. 그 후 ‘넌 몰라’에서 다이애나가 남편에게 갖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강렬한 록 리프랑 같이 들려줘요. 록이라는 장르가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지만 실제로 극 중 인물들이나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거든요. 거기서 상충하는 에너지가 있어요.

송스루 뮤지컬은 감정을 쌓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있겠어요.
최재림
: 그래서 노래하는 지점까지 주어진 상황, 주고받는 대화, 내가 어떤 상태를 겪고 있는지를 인지하고 감정을 이어가는 게 중요해요.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음악의 덩어리가 갑자기 커져버리기 때문에. 특히 앞에서 얘기한 ‘좋아질 거야’-‘그 아인 없어’-‘넌 몰라’-‘바로 나’로 이어지는 이 장면이 다이애나에게는 되게 힘든 신이에요.

게이브는요? 엄마에게만 보이는 게이브는 어떻게 보면 귀신이라 할 수 있잖아요. (웃음) 무의식을 어떻게 실체화하려 했나요?
최재림
: 이게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워서 연기가 안 돼요. 그래서 초연 때는 그냥 엄마가 처한 상황에서 나오는 아들의 모습에만 포커싱을 맞췄어요. 정말 100% 환상으로. 엄마 앞에 실체화됐을 때 엄마는 어떤 아들을 보고 싶어 할까. 100% 헌신하는 아들일까, 모든 엄마가 원하는 완벽한 아들일까. 그런데 이번에는 큰 콘셉트는 유지하되 이 가족들이 갖고 있는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을 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동양적 정서의 혼령이라기보다는 엄마 머릿속에는 사랑하는 아들, 아빠한테는 사랑하지만 좀 사라져줬으면 좋겠는 존재, 나탈리한테는 무조건 열등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겠네요.
최재림
: 누구든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치유하고 싶단 말이에요. 계속 아파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1번으로 계속 살았는데 해결이 안 돼죠? 그럼 2번, 3번을 선택해야 하는데 의식적으로 그걸 못해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선택하고 싶을 거예요. 그 선택을 하게 하고 싶어요. 무대에는 제가 나오기 때문에 게이브가 조종하고 개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선택은 결국 각자의 몫이거든요. 저는 거기서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상자 안을 보세요, 물건을 꺼내세요’라고 말하는 역할인 거죠.

다른 게이브들과는 다른 노선인가요?
최재림
: 초연 때 (한)지상이 형이랑 지금 (서)경수는 유령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스스로 해결 안 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만약 게이브가 유령이라면 얘가 원하는 건 엄마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사는 건데, 왜 엄마를 떠나보냈을까? 왜 갑자기 아빠한테 나를 드러내지?

납득이 안 되면 못 움직이는 스타일인가 봐요.
최재림
: 정확하게 그래요. 제가 소띠에 황소자린데 (웃음) 그냥 고집이 세요. 맞건 틀리건 내가 아니면 아니에요. 틀린 걸 아는데 인정을 안 하거든요. 원래 되게 기분파인 데다 뭐든지 내가 하고 싶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해요. 그래도 요즘은 냉정하게 생각하려는 편이에요. 문제가 터졌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면 그게 가실 때까지 기다리고, 그게 사라지고 난 후에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해요. 개인적인 문제라면 최대한 핑계를 안 대려고 하고.

굉장한 기분파라고 했는데 많이 변했네요.
최재림
: ‘이거 먹지 마’ 했는데 한 200번 먹은 거죠. (웃음) 제가 자기방어가 좀 센 편이라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말이든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든 완전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든 좀 부정적인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내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가 “이거 진짜 맛없지 않냐?” 라고 얘기를 하면 저도 모르게 주스에 대한 변명을 해요. “1,000원짜리니까 당연히 네가 생각하는 그 맛이 안 나지. 아니면 5,000원짜리를 먹든가” 이런 식의 대화가 흔히 진행돼요. 왜 이렇게 삐뚤어 쳐 먹어가지고 (웃음) 상대방이 아니라고 하면 왜 아니라고 할까를 생각하면 되지 내가 뭔데 변명을 하고 욕을 먹나. 근데 비슷한 일이 생기고, 그런 상황이 될 때마다 앞으로는 이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똑같이 해요. 왜지? 그때부터 자아성찰을 시작했죠. 근원을 찾아내도 해결이 되진 않아요. 어쨌든 만들어진 성격이니까. 하지만 이걸 내가 알고 있으면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예전처럼 행동을 안 하면 미칠 것 같아도 하지 말자가 되는 거죠.

그럼 왜 그런 성격이 됐어요?
최재림
: 저한테 우월감이 좀 있어요. 아버지가 공군에서 복무를 하셨는데 꽤 높은 랭크까지 올라가시고 전역을 하셨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누구 아들’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단 말이에요. 어릴 때 남자들은 키 크면 장땡이고. (웃음) 군 가족 시스템 안에서는 아버지 랭크 따라 움직이고 아버지 가시는 길에 웬만하면 방해가 안 되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잘 포장된 삶을 살려고 하는 거예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굉장히 바르고 잘 큰 애처럼. 그러면 주변에서 칭찬을 해주고, 그 칭찬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들고, 그게 자기 우월감으로 바뀌어요. 그러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데도 왠지 내가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되고, 누군가가 어떤 의견을 피력했을 때 내 생각과 다르면 그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고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렌지 주스 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상대는 저를 미친놈으로 생각하고, 그럼 저는 왜 그렇게 됐는지 자책하고.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 때 가족들한테 이 얘기를 했어요. 내가 이렇게 자라가지고 성격이! 서운하다! 우리 가족은 왜 이런가! (웃음)

그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인가요.
최재림
: 그렇진 않은데 제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죠. 사실은 어머니가 관계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꺼내셨어요.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진심으로 내 마음을 써서 상대방을 움직여본 게 몇 명 없는 것 같다. 너희들도 알게 모르게 거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서 우려가 된다.” 깜짝 놀랐죠. 아~니! 엄마가 이런 얘기를! 지금이구나! (웃음)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직면했으니까 이제 풀어가야죠. 사실 다들 내색을 잘 안 하잖아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따뜻하게 내색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작품에 대한 고민과 개인의 고민이 같이 가고 있네요.
최재림
: 문제를 껴안고 있는 가족을 연기하다 보니 배우 모두가 실제의 자기와 직면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공연이 아주 잘 끝난 날에도 마냥 해피하진 않아요. 정서적으로 조금씩 힘든 부분이 있지만 그걸 항상 같이 해결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관객분들도 우리 공연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됐을 때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게이브도 그렇고, 왜 이지나 연출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최재림의 유다를 ‘이성적’으로 만들었는지를 알 것 같아요.
최재
림: 사실 유다 같은 경우엔 일단 몸이 크니까 그 피지컬로 야수파로 가면 돼요. 막 화내고 힘으로 하려고 하고. 게이브도 그렇고요. 근데 그렇게 했으면 재미없었겠죠. 나름 “연기가 중요하다” 이러면서 연기도 배웠는데 (웃음) 좀 더 레이어를 쌓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많은 사람이 최재림이라는 배우를 찾을 때 연기 배우러 한예종 연극원 갔었잖아요. 왜 가냐는 말 많이 들었죠?
최재림
: 연기를 좀 해야겠다고 처음 얘기하신 건 (박)칼린 선생님이었는데 이유는 단순했어요. “춤, 노래, 연기가 뮤지컬배우가 갖춰야 할 조건이라면 1에서 100까지 카운팅을 했을 때, 노래는 전공했으니 40~50인 데 비해 춤은 10이고 연기가 한 15라면 갭이 너무 크지 않냐 이건 좀 메꿔야 되지 않겠니.” 그 얘기를 한 2년간 하셨거든요. 처음에는 철이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성격이 다른 작품을 한두 개 하다 보니 조금 이해가 되더라고요.

현장에서도 배울 수 있는데,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최재림
: 사실 둘 다 중요한데 각자에게 더 중요한 게 뭔가를 따져봤을 때 저는 후자가 더 필요했던 거죠. 만약에 헬스를 한 10년 해서 벤치프레스를 120kg까지 들 수 있다고 쳐요. 어마어마하게 잘 드는 거지만, 그때가 되면 하루에 120kg씩 50개를 들어도 근육이 더 이상 커지지 않아요. 몸이 어떻게 드는지 알기 때문에 요령이 생겨서거든요. 그런데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과 왜 드는지를 정확하게 이론적으로 파악을 하게 되면 같은 무게를 들어도 근육이 더 성장을 하게 돼요. 그거랑 똑같다고 봐요.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기술이 있어도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를 모르면 어느 선에서 발전이 멈추더라고요.

그렇게 배우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던가요?
최재림
: 수학공식 배우면 문제를 풀 수 있게 돼서 계속 풀고 싶어지잖아요. 전에는 대본을 보면 그냥 책 읽듯 읽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은 아니까 어떻게 좀 더 재밌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뻔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면서 재밌어지는 것 같아요.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하는 일을 더 잘하려고 한 거였거든요. 근데 계속 하다 보니 내가 완벽한 스킬을 갖게 됐다고 했을 때 그게 좋은 배우일까를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니더라고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요.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유무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으로서 그런 능력이 생기고 거기에 익숙해진다면 작품 속 인물을 만났을 때도 그 마음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더 좋은 배우가 되겠지 싶어요. 사실 관계가 길어지고 깊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당연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반대로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겠죠.

[더뮤지컬] 인터뷰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최재림
: 헛소리죠 뭐. (웃음) 결국엔 ‘더 나은 배우가 되겠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머리로는 이해를 잘 하는 편이긴 한데, 그걸 마음으로 같이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더 좋은 연기로 공연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배우가 되면 관객들이 분명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아주실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조금이라도 작품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서 관객들이 ‘정말 재밌다 한 번 더 봐야지’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기여를 한 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더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데 일조하게 되는 거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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