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 “지금도 에포닌처럼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2015.12.30
독일에 베르테르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에포닌이 있다. 롯데와 마리우스를 원했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인물. 관객들은 이들에게서 애틋함을 느끼지만, 1년이 넘도록 [레미제라블]의 에포닌으로 살아온 박지연은 그녀의 삶은 고통이었다고 말한다. 눈물조차 사치인 에포닌의 삶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모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됐다. 그리고 이 경험은 고스란히 박지연에게로 이어져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다음은 [레미제라블]의 뜨거움을 안고 사는 박지연의 이야기다.

목이 많이 잠겼네요.
박지연
: 도대체 이걸 어떻게 1년간이나 했지 싶어요. 공연하면서 이렇게 아팠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망했어요 이제. (웃음)

[레미제라블]이 워낙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공연이라 그런가 봐요. 장발장과 자베르를 제외한 모든 배역이 본인 역 외에도 앙상블을 소화하잖아요.
박지연
: 작품 자체가 요령을 피울 수 없게 돼 있어요. 앙상블 연기를 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레미제라블]은 공연을 하지 않더라도 같이 가는 공연 같아요. 연습할 때도 그랬어요.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해요. 게다가 연출이 원하는 것도 ‘좀 더’, ‘계속’, ‘한 번 더’거든요. 하나라도 가짜로 할 수가 없고, 가짜로 하면 그 죄책감이 오래 가니까 그걸 안 느끼려고 더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2년 만에 다시 에포닌으로 무대에 서게 됐는데요. 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요?
박지연
: 지난번의 경험 덕분에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제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연출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넌 에포닌을 너무 잘 알고 그대로도 에포닌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근데 너는 사랑도 너무 잘 안다.” 그 말이 제 뒤통수를 빡 때렸어요. ‘아 맞다. 사랑을 알면 안 되잖아!’ 그동안 좀 더 나은 내가 됐으니 더 나은 에포닌이 되었겠지라고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돌아보면 초연 때도 그 지점에서 많이 부딪혔거든요. 사랑을 모른다는 걸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사랑보다는 에포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더 깊게 얘기를 나눴어요.

에포닌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보다는 마리우스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알게 된 여자에 초점을 맞춰야 되는 거군요.
박지연
: 그래서 호불호가 갈려요. 에포닌이 약간 아련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단어도 짝사랑, 나 홀로 이러니까. 그런데 연출이 원하는 에포닌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한국어 가사랑 부딪혔던 것도 그 지점이어서 이번 에포닌 가사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빠졌어요.

그럼 에포닌은 어떤 여자인가요?
박지연
: 이 여자애는 우리 생각보다 더 거칠고 더럽고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았을 거예요. 안 맞고 칼에 안 찔리려고 내 치마 열었을 거고, 5천 원 벌겠다고 사람 목 긋는 것을 봤을 거고, 구정물과 기름때에 몸도 엄청 더럽겠죠. 그런데 그런 몸을 만지고 핥는 남자들이 지긋지긋했을 거고요. 고작 10대인데. 이렇게 살았으니 어떻게 사랑을 알겠어요.

에포닌의 삶은 보통의 여성들이 현실에서 평균적으로 겪는 것 이상이라 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박지연
: 초연 프리뷰 첫공날 외국 무브먼트 디렉터가 저를 부르더니 갑자기 싸움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옷도 막 잡아당기고 목도 조르고 뺨도 때리고 머리끄댕이도 잡고. 저도 막 소리 지르고 싸우다가 너무 속상해서 엉엉 울었어요. 나 이따가 공연해야 되는데 왜 이러지부터 왜 내가 이런 걸 해야 되지, 어떻게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하지 싶었죠. 근데 그때 마이클이 그러더라고요. 여기서 울지 않으면 에포닌이라고. 이번에 ‘사랑을 안다’라는 말이 제 뒤통수를 쳤다면, 초연 때는 이 연습이 저를 그냥 막 흔들어놨어요.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걸 직접 겪음으로써 내 안에서 바뀐 게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에포닌 오디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나 커버하는 친구들에게도 이 얘기를 항상 해줘요. 필수. 정석 같은 코스입니다. (웃음)

어렵게 체득한 셈인데 나만 알고 싶지 않아요? (웃음)
박지연
: 네, 반드시. 제발. 에포닌을 원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고 에포닌으로 뭔가를 준비하는 친구들도 많거든요. ‘On My Own’을 부르는 건 쉬워요. 하지만 이 노래가 힘든 건, 유명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모르는 채로 사랑한다고 처음 말해야 하기 때문이거든요. 노래의 정서나 느낌을 잘 모르겠다고 할 때 이 얘기를 해주면 그 친구들도 뭔가 변화를 느끼는 것 같았어요.

그런 에포닌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신이 많지 않아 아쉽겠어요.
박지연
: 마리우스를 제외한 에포닌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딱 두 군데뿐이거든요. 보여줄 수 있는 곳에서는 좀 더 세게 하려 하고, 마리우스랑 있을 때도 에포닌이 살아온 삶을 관객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에포닌은 그래도 나아요. 판틴은 등장하자마자 ‘I Dreamed a Dream’ 부르니까. (웃음) 이번에 다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그런 부분이에요. 에포닌뿐만 아니라 [레미제라블]이라는 작품에 임하는 자세 같은 것들이 많이 달라졌거든요. 예전엔 마리우스, 코제트, 저 셋 다 경험이 많지 않아서 무조건 열심히! 였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사이 작품을 좀 하고 마리우스 하는 (윤)소호도 무대 경험이 많아서 좀 더 여유가 생겼어요. 덕분에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들을 바라볼 때의 생각도 넓어졌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나라도 더 느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박지연
: 요즘은 가슴 속 뜨거움 같은 게 더 생겨서 객석으로 행진하면서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부르고 싶어요. (웃음) [레미제라블]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코제트, 마리우스, 떼나르디에 부부 넷뿐이에요.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남았지만, 떼나르디에 부부는 남을 희생시켜서 살아가요. 그게 참 묘하더라고요. 떼나르디에 부부가 부르는 ‘Master of The House’도 예전에는 공연이 너무 무겁고 어두우니까 그런 장면이 필요하지! 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진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넣어놨구나 싶어요. 그들도 마찬가지로 비참한 사람들이고. 장발장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는 저렇게 희생하며 살아가는 한 인물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죠. 에포닌도 그래요. 예전엔 그냥 마리우스를 사랑하고 마리우스를 위해 죽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에포닌처럼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싶더라고요. 에포닌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총 맞는 게 싫다, 라고 생각한 아이인데 허무하게 죽잖아요. ‘이렇게 좋은 작품,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 거기서도 유명한 에포닌!’ 이렇게 생각했던 내가 참 철없었구나 싶었어요.

저 역시도 2년 전 이 작품을 보면서 당시 상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오히려 요즘의 한국과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겹쳐지는 이미지들도 많고.
박지연
: 뮤지컬만 따지면 30년이지만, 책이 쓰인 건 더 먼 과거잖아요. 사실 배경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얘기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이건 어느 곳에서나 끊임없이 벌어지는 일이고, 우리가 곧 코제트와 마리우스거든요. 그럼 나 박지연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를 생각해보면 희생한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밖에는 없구나 싶어요. 정말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닌. 왜 이 작품이 계속 공연되는지 알겠어요. [레미제라블] 안에서 뭔가 인생이 보이는 거예요. (웃음) 초연 때는 공연을 워낙 길게 해서 빨리 끝내고 이 공연을 완성했다는 기분을 느끼고도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를 것 같아요.

이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업계 유망주가 됐잖아요. 그런데 다시 [레미제라블]을 하기 전까지 [고스트]와 [원스]만 했다는 게 좀 의외였어요.
박지연
: 좀 오래 쉬었어요. [원스] 끝나고도 3개월 이상 쉬었고. 이야기들은 많이 있었는데 쉽게 선택을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만 해왔거든요. 단순히 내 경험을 쌓기 위해 하는 공연이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제가 사랑하고 하고 싶은 거,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에포닌은 결이 좀 다르지만, [맘마미아]의 소피,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남, [원스]의 걸은 본인의 밝은 에너지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인물들이잖아요. 박지연의 어떤 모습 때문에 그런 역을 자주 한다고 생각해요?
박지연
: 뮤지컬을 하기 전에는 날카롭다고 해야 하나? 좀 그랬어요. 가시가 많고 사람들이 “쟨 뭐야?”라고 생각하는. 그런데 공연 일을 하면서 밝아지고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요. 바뀐 성격 덕이기도 하지만 오디션 장에는 그 배역에 맞는 분위기를 확 안고 들어가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별의별 소리를 다 들어요. [원스] 때는 연출이 저보고 파랑새 같다고도 했어요. (웃음) 외형적인 것도 소리가 잘 맞아야 좋은 시너지를 만들 수 있는데 감사하게도 그런 게 잘 맞아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이미지가 고정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은 없나요?
박지연
: 이제 스펙트럼을 넓혀야 되지 않겠냐라는 말을 듣긴 해요. 근데 아직까지는 제 색깔을 지키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못하는 걸 할 수 있는 능력도 안 되기 때문에 준비 기간도 필요하고요. 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죠. 하지만 연륜이 쌓이고 내가 뭐든지 흡수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다양하게 해도 절대 늦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시작을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같은 장기공연으로 했더니 금방금방 지나가는 것들에는 아직 큰 매력을 못 느끼는 부분도 있고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해보고 싶냐는 말에 늘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거든요. 재공연은 [레미제라블]이 처음이었는데 해보니 작품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됐잖아요. 하나를 깊게 알아간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은 거예요. 아무리 오래 했어도 또 다른 내가 되어서 같은 무대에 선다는 건 다르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공연이라 해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박지연이라는 배우가 좋은 저음을 갖고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박지연
: 저 파트 나눌 때 메조소프라노나 알토로 들어가요. 배우들 사이에서도 제 저음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를 봤을 때 까랑까랑하고 얇은 소리를 생각하니까 몰랐던 거죠. 판틴이랑 노래할 때 저음이 저거든요. 의외의 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웃음) 저음을 좋아하는데 여자 뮤지컬 넘버 중에는 저음 노래가 별로 없어요. 나는 왜 자베르가 아닌가! (웃음)

방금 자베르 얘기를 했는데요. 남자배우였다면 자베르를 하고 싶은 건가요?
박지연: 자베르 진짜 매력적이에요. 예전에는 자살하는 거 보면서 그냥 살면 되지 왜 자살을 하나 싶었거든요. 너무금해서 남자에게 신념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주변 남자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어요. 다들 확고한 자신만의 뭔가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대부분 자베르를 이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마음을 느껴보고 싶어요.

이제 데뷔 6년 차를 향해 가는데,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게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박지연
: 5년 반 정도가 됐고 그동안 쉬지 않은 것도 아닌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준비했던 과정들이 떠올라요. [원스]는 배우들이 악기를 다뤄야 해서 홍대 합주실에 모여 새벽까지 악기 연습을 했어요. 보통 뮤지컬 연습과 달라서 새로웠죠. [맘마미아] 때는 춤을 못 춰서 혼나가면서 배우고, [미남이시네요] 때는 안 되는 K-POP 안무 배운다고 연습하고. [고스트]는 첫 주연 같은 느낌이어서 두려운 마음으로 사람들 만나고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나요. 언제나 첫 공연이 끝나면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그간의 과정이 떠올라서거든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럼 앞으로는 어떤 것을 더 해보고 싶나요?
박지연
: 이거 하면서 정말 좋았거든요. 계속 좋았으면 좋겠어요. 데뷔했을 때 선배들이 “지금 모습 변치 말고 해”,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해주셨어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했거든요.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알겠어요. 저 뮤지컬 처음에 그냥 좋아서 했거든요. 그런데 가끔 피곤해서 하기 싫어질 때가 있어요.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제가 좀 안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안이 비어 있으면 흔들리게 되니까. 내면을 채워서 세상 보편적인 가치들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좋아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말이 긴데 그냥 재밌게 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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