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을래요?’라는 마법의 주문

2015.12.23

“라면 먹고 갈래요?” 최근 릴리즈된 농심 신라면 TV 광고 ‘사랑의 설렘-연인 편’에서 자기 집까지 바래다준 남자를 향해 여자는 묻는다. 맞다.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건넸던 바로 그 오래된 문장이다(그리고 영화에서도 그들은 신라면을 먹었다). 다만 광고를 비롯해 상당수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달리 원래 대사는 “라면 먹을래요?”였다. 이후 라면을 끓이며 다시 던진 “자고 갈래요?”라는 명백한 유혹의 대사가 더해져 사후적 재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 대사는 인상적이었고, 두고두고 회자되었으며, 14년이 지나 국내 최다 매출을 기록하는 라면 광고에 인용됐다. 하지만 궁금하다. 실제로 이 대사는 유혹적일까. 은수와 상우의 연애라는 영화의 스토리 안에서 너무 결과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정말로 라면은 설렘을 일으킬 만한 음식인가.

왜 라면인가. 이 질문은 왜 짜장라면이 아니고 왜 알리오 올리오가 아니며 왜 비빔냉면이나 잔치국수가 아닌가, 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시계를 돌려 문제의 장면으로 가보자. 늦은 밤 집 근처까지 차로 태워다준 상우에게 은수는 “태워다줘서 고마워요”라 말하고 상우는 “고맙긴요, 뭘”이라 한 뒤 잠시 침묵, 그리고 상우는 악수를 청하고 은수는 웃으며 악수한 뒤 차에서 나간다. 그리고 다시 차 문을 열고 말한다. “라…면 먹을래요?” 두 사람 모두 헤어지는 것이 아쉽지만 유예할 방법을 모르는 남자는 어색하게 악수를 청하는 게 전부다. 왜 못 잡았지, 라는 생각이 들 바로 그때 은수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이것은 없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했던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단순히 유혹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고 싶은 것이었다면 커피 한 잔, 좀 더 과감하게는 술 한 잔을 청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에게는 돌이켜봐도 덜 쪽팔릴,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과연 여기에 라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있을 수 있을까.

늦은 시간, 맛있는 저녁 혹은 야참을 제공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라면은 분명 맛과 가성비, 요리에서의 효율성 모두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한다. 스파게티 만들어줄까요? 부담스럽다. 잔치국수 먹을래요? 뭔가 싱겁다. 비빔냉면 좋아해요? 물냉면이 좋다. 상대방의 호의를 부담 없이 받아들여 간단하고 맛있게 배를 채우기에 라면은 최적화된 음식이다. 그럼에도, 그뿐만은 아니다. 라면은 다분히 정서적인 음식이다. god의 ‘어머님께’ 가사에서 또 다른 국민 음식인 짜장면을 부르주아의 그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임춘애의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될 정도로 서민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다. 영화 속 상우는 “라면이랑 소주 같이 먹으면 맛있는데”라고도 하지만 이 둘은 가장 일상적이면서 정서적인 포만감을 준다. 라면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과자처럼 이러한 기분을 환기하는 동시에, 특유의 서민적인 상징성은 수평적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앞서의 ‘사랑의 설렘-연인 편’뿐 아니라 비슷하게 공개된 신라면 광고인 ‘따뜻한 격려-아르바이트 편’, ‘뜨거운 응원-취준생 편’ 모두 성별, 직급, 세대 간 차이를 지닌 두 사람의 정서적 공감을 강조한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물론 라면을 먹는 경험이 다른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듯 로맨틱하진 않다. 다만 14년 전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준 연애의 한 풍경과 지금의 라면 광고가 보여주는 건, 어떤 로맨스도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두 사람을 연결할 마음의 교집합 위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로맨스의 기본은 관계의 기본이다. 수줍음 많은 상대가 쉽게 동의할 수 있도록 은수가 기습적으로 날린 말은 그래서 유혹적이기 이전에 배려가 돋보이는 문장이다. “라면 먹을래요?” 생각할수록, 정말 끝내주는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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