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패밀리즘│② 누구의 딸일 수밖에 없는 덕선·나정·시원

2015.12.15
“과격한 말괄량이에 사회적 자아가 없고 모두에게 아이처럼 편하게 대하는 패밀리 걸.” 최근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자신의 SNS에서 tvN [응답하라] 시리즈 세 여주인공의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성덕선(혜리),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의 성나정(고아라), [응답하라 1997](이하 [응칠])의 성시원(정은지)은 사는 곳도 좋아하는 것도 다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그들은 늘 아이같이 솔직한 성격으로, 자신이 느끼는 대로 감정을 표현한다. 화가 나면 소리부터 지르고, 갑자기 느낀 사랑의 감정에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덕선은 분노, 서운함, 부끄러움 등 부정적인 감정을 전혀 다스리지 못한 채 고함과 주먹질로 표현한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겨 짝사랑했던 선우(고경표)가 언니 보라(류혜영)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덕선의 반응은 자신의 착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영문도 모르는 선우를 다그치고 울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응팔]에서 덕선은 이웃 어른들로부터 두루 사랑받는 ‘예비 며느리’ 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 전체가 덕선과 같은 여주인공이 남편을 찾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남편감들은 사회적으로 미숙한 여주인공들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준다. 그들은 매우 공부를 잘하거나 자기 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여주인공을 늘 지켜보며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려 노력한다. 말은 퉁명스러워도 좋아하는 여자에 집중하며 다정하게 행동하고, 톱스타지만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는 소탈한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그 ‘남편감’들이 여주인공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덕선이 ‘전교 999등’이면서도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자신이 누구를, 또는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에만 관심을 쏟는 반면 남학생들은 이미 학교 폭력, 또는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 등 사회의 현실과 부딪힌다. 즉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편찾기’란, 결과적으로 능력 좋고 성숙한 남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여주인공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에 가깝다.

[응팔]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편찾기’ 세계관을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덕선은 나정의 연세대 농구부나 시원의 H.O.T.처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대상도 없다. 나정에게는 전공이 있었고, 시원은 좋아하는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서 대학에 가고 직업을 찾게 된다. 반면 덕선은 지금으로서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다. 그의 서사는 오직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통해 채워지고, 그의 삶은 주변 남자들에게 보호받을 때 가능하다. 이를테면 덕선이 남동생 노을(최성원)의 여자친구 수경(이수경)과 싸움을 벌여 경찰서에 갔을 때, 달려온 동일(성동일)은 “남의 귀한 자식”에게 왜 그랬냐며 역시 남의 귀한 딸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렇게 덕선은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반면 부모를 잃은 수경 자매는 수차례 억울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맞서지 못한다. 수경에게는 그런 힘을 가진 어른 남성 보호자가 없다. 지금보다 더 가부장제가 굳건했던 1988년으로 시대적 배경이 바뀌면서 여자는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처럼 그려진다. 큰 목소리도, 주먹질도, 화려한 외양도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과는 무관하다.

덕선의 언니 보라는 [응팔]에서 유일하게 다른 길을 가려는 여자였다. 그는 자상하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세계, 쌍문동 골목으로부터 벗어나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며 가치관의 충돌을 일으켰다. 고집 세고 때로는 독선적이거나 폭력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 보라는 사랑스럽거나 순종적인 여성 혹은 손아랫사람이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응팔]에서 보라의 이런 성격은 ‘예비 며느리’로서 감점 사유고, 어른들은 덕선과 달리 그를 꺼린다. 결국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채 데모를 하고, 남자친구를 향해 “내 얼굴이야. 내 맘대로 할 거야.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고 날 세워 선언하는 것은 스물한 살의 보라에서 멈춘다. 27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 보라(전미선)는 과거 부모에게 그러했듯, 자신이 담배 피운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사근사근한 아내가 된다. 수경이 노을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나한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 사람은 처음이라서”였다. 덕선이든 보라든 수경이든 [응팔]의 여자들은 모두 태도를 고쳐야 할 ‘말괄량이’들일 뿐이고, 그들은 남자들에게 ‘건전하게’ 통제되고 보호받음으로써 행복해진다.

그래서 [응답하라] 시리즈는 어느 시대를 살았던 여자아이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되 한 인간으로서 그의 목소리를 거의 들려주지 않는다. 대신 동창회나 집들이, 인터뷰 등 그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장치를 통해 많은 신데렐라 드라마들이 막을 내리며 생략하는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든든히 보장하며 안도감이라는 판타지를 제공한다. 고부갈등이나 경제적 문제 등 ‘완벽한’ 결혼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미리 제거된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남자(들)와 가족같이 허물없이 지내던 여주인공이 ‘노력형 천재’와 ‘전문직 엘리트’라는 배우자 선택지를 얻고, 결국엔 원래 더 가깝던 상대와 결혼해 중산층 이상 계급으로 편입된다. 이것은 독립된 한 가정의 탄생이라기보다 두 사람이 원래 속해 있던 유사 가족이 가족으로 변형 혹은 확장되는 데 가깝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자는 늘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내다.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아이가 가장 사랑스런 여자아이라고 믿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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