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미국 TV쇼는 페미니즘의 땅으로 간다

2015.12.11
2015년을 되돌아보며 미국의 TV쇼에서 인상 깊었던 남자 주인공들을 떠올려본다. 잘 생각이 안 난다. 열심히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해도 [VEEP]의 에이미(안나 클럼스키)가 셀리나(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에게 폭발하던 장면만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유튜브에서 찾아볼까 해도 추천 영상에 떠 있을 [인사이드 에이미 슈머]와 [SNL]의 여성 코미디언들이 만든 뮤직비디오를 무한 반복하다 하루가 다 갈까 봐 못 가겠다. 그냥 받아들여야겠다. 이제 와서 남성들이 이끌었던 쇼를 새로 찾아보기에는 늦었다. 이미 봐야 할 쇼들이 잔뜩 밀려있다. 몇 년째 추천이 쏟아지고 있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은 벌써 시즌 3이고 레나 던햄의 [걸스]도 시즌 4다. 장르라도 한정되어 있었으면 덜했을 텐데 다들 어쩜 이렇게 못하는 게 없는지. 드라마부터 코미디, SF에 스릴러까지 재능 있는 여배우들과 여성 제작자들을 쫓아다니며 기립박수 치다가 한 해가 다 갔다. 앞으로는 더 부지런해져야 할 것 같다. 반짝하고 끝날 트렌드처럼 보이지가 않으니. 

올 한 해 미드 시장을 돌아보면 ‘여자들은 원래 ~하다’라는 말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표현은 ‘못하는 게 없다’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 명의 여배우가 여러 명의 클론을 연기하는 SF 수작 [오펀 블랙]과 여성 정치인을 주인공으로 한 풍자 코미디 [VEEP], 몇십 년 만에 흑인 여배우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드라마 [하우 투 겟 어웨이 위드 머더]와 [스캔들] 그리고 낙태와 종교 문제를 재치 있게 풀어낸 [제인 더 버진] 등이 성공적으로 시즌을 거듭하고 있는 와중에 새로운 얼굴들도 대거 등장했다.

코미디에서 여성들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여성 리더를 주인공으로 진취적인 페미니즘을 선보였던 에이미 폴러의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은 박수 속에서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주인공 키미 슈미트를 연기한 배우 엘리 캠퍼의 활기는 건강하고 씩씩한 소녀를 연상시킨다. 납치 감금과 그로 인한 PTSD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매회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제작자 티나 페이의 천재적인 감각도 여전하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도 쏟아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암캐’라는 욕설에 “강아지들을 낳는 개라고? 고맙다!”라고 받아치며 씩씩하게 전진하는 여자 주인공이라니,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에이미 폴러가 제작자 겸 멘토를 맡은 독특한 시트콤 [브로드 시티]도 두 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웹 시리즈 시절부터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이 쇼는 TV로 옮겨와서도 여전히 메인 스트림에서 살짝 엇나가 있는 독특하고 뻔뻔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쇼의 주연 배우들이자 작가들이기도 한 애비와 일라나는 여성들의 우정과 현실적인 페미니즘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찬사를 받으면서 기억해야 할 이름들로 떠오르고 있다. 다크 코미디의 여왕 에이미 슈머의 거침없는 전진도 계속되었다. 2014년 후반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녀는 2015년에도 티나 페이와 줄리아 루이 드레이퍼스, 패트리샤 아퀘트와 힘을 합쳐 ‘last fuckable day’ 같은 날카로운 풍자를 내놓는가 하면 고전 명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야심차게 패러디하기도 하며 페미니스트 슈퍼스타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서부극 이후 가장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영화관을 점령했던 슈퍼 히어로 장르도 스몰 스크린으로 건너와서야 비로소 진화하기 시작했다. [에이전트 카터]와 [슈퍼걸] 그리고 [제시카 존스]는 그야말로 작정하고 만든 여성 중심적 히어로물이다. 이들은 마치 약속하고 분담이라도 한 듯이 서로 다른 유형의 여성 히어로들을 내놓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에이전트 카터]의 페기 카터(헤일리 앳웰)가 앞 시대의 페미니스트 영웅들을 떠올리게 한다면, [슈퍼 걸]은 장르물의 틀을 영리하게 사용하여 남성의 그늘에 가려지기를 거부하는 젊은 현대 여성의 성장기를 그려내고 있다. 여러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이 함께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A.K.A. 제시카 존스]는 좀 더 어둡고 과감하다. 이 쇼의 메시지는 신선할 정도로 직접적이다. 남성의 폭력에 고통받은 여성들이여, 일어나 맞서 싸우자.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를 계속해서 부정당하면서도 다른 여성과 힘을 합쳐 맞서 싸우는 주인공 제시카 존스(크리스틴 리터)는 가장 늦게 나타났지만 가장 중요한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여느 영화 못지않다는 말로는 이제 이들을 제대로 칭찬할 수 없다. 영화보다 낫다면 모를까. 미래는 TV에 있다는 말이 미국의 여배우들과 여성 제작자들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장 먼저 사장될 미디어라는 예상을 뒤엎고 인터넷과 손잡으며 유연하게 진화해온 미국의 TV쇼들은 지금 어떤 할리우드 영화도 선뜻 가지 않으려 했던 곳으로 용감하게 가고 있다. 그곳의 이름은 페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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