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현이 레드카펫에서 ‘실패하기 어려운’ 드레스를 입는 법

2015.12.10
시상식에서 주목받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주연·조연·신인·인기상 중 하나라도 받거나, 진행을 맡거나, 레드카펫에서 이슈가 되는 것이다. AOA의 설현은 지난달 26일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이 중 두 가지 요건에 부합했다. 인기스타상 수상자로 무대 위에 올라갔고, 레드카펫에서는 가슴골이 드러난 화이트 드레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시 설현이 입었던 드레스는 배우들 사이에서 ‘레드카펫용 0순위’로 꼽히는 제니 팩햄의 제품이었다.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자빈이 즐겨 입고, 전지현이 결혼식 기자회견 때 선택했던 이 영국 브랜드는 2013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국내 레드카펫을 휩쓸었다. 지난해 백상예술대상·부산국제영화제의 김희애, 올해 백상예술대상의 전지현·박신혜·김사랑, 부산국제영화제의 손예진이 설현에 앞서 제니 팩햄의 드레스를 입었다. 톱스타들은 레드카펫에서 해외 명품 브랜드의 협찬을 통해 자신이 접촉 가능한 브랜드의 ‘급’을 노출하고, 스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경향이 있다. 오스카 드 라 렌타와 루이비통이 지난해 각각 전지현과 배두나를 위해 개별 제작했던 의상은 대중이 패션 업계에서 두 배우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작용했다. 설현도 확보하기 만만치 않은 제니 팩햄 드레스를 입어 ‘떠오르는 스타’로서의 힘을 과시했다. ‘실패하기 어려운’ 드레스를 입은 셈이다.

레드카펫 성공 사례도 많이 연구한 듯하다. 청초한 분위기를 살리는 데 제격인 화이트 레이스 장식의 롱 드레스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승부를 걸었다. 가슴골과 등을 동시에 노출해 AOA 활동과 CF로 다진 섹시한 느낌도 놓치지 않았다. 선배 배우들이 신체 일부를 노출하는 화이트 드레스로 청순미와 섹시미를 함께 부각시켰던 고전적인 방식을 참고한 것이다. 노출을 자제한 웨딩드레스 계열 제품으로 순수함만 부각시켰던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에서의 전략보다 훨씬 영리했다. 설현은 ‘AOA 설현’이 아니라 ‘배우 김설현’으로 각인되는 데 한 걸음 다가섰고, 노출 수위를 조절해 청룡영화상이 암묵적으로 요구해온 격식에 보폭을 맞추는 모양새를 취했다. 
설현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에게도 레드카펫은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다. 가수들은 무대 위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을 수 있지만, 배우들의 작품 속 패션은 배역에 지배된다. 한류 스타를 연기한 전지현은 에르메스 망토를 걸칠 수 있지만, 가난한 여성을 연기한 배우가 명품 백을 들면 시청자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인스타그램에서는 최대한 일상적인 모습을 노출해야 하기에 힘을 준 옷은 불필요하다. 결국 배우들이 한껏 차려입을 수 있는 곳은 시상식, VIP 시사회, 제작발표회, 패션쇼, 브랜드 행사장, 공항, 화보 촬영장 정도로 압축된다. 이 중 시상식은 치렁치렁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채 비일상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걸어 다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용기만 있다면 기네스 팰트로의 대형 장미 드레스나 리한나의 계란 지단 드레스도 시도할 수 있다. 게다가 패션매거진의 화보가 일종의 스튜디오 녹음본이라면 레드카펫은 라이브 연주라 훨씬 생생하다. 배우는 무도회에 막 도착한 신데렐라처럼 동화적인 꿈과 환상을 구현하고, 대중은 유명 배우들이 미를 다투는 장면을 느긋하게 감상한다.

레드카펫에서 대중을 만족시키면 꽤 달콤한 선물이 기다린다. 김소연은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반신이 거의 다 노출된 드레스를 입은 뒤 SBS [식객]과 KBS [아이리스]에 연이어 캐스팅됐다. 무명 배우였던 강한나는 2013년 같은 영화제에서 엉덩이골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뒤 영화 [순수의 시대] 주연에 발탁됐다. 김혜수·김아중·김사랑은 몸의 굴곡이 확연한 클레비지 드레스로 가슴골을 드러내며 섹시한 이미지를 강화했고, 박신혜·한효주·이연희는 화이트·핑크·베이지처럼 은은한 색상의 시폰 드레스로 특유의 청순함을 보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끌어올렸다. 일부 배우들이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거나, 아예 초대받지 못했거나, 군소 시상식이더라도 꼬박꼬박 출석 도장을 찍고 종종 파격 노출을 시도하는 이유다.

하지만 레드카펫에서의 이슈 몰이는 극적인 만큼 휘발성이 강하다. 강소라는 지난해 Mnet 아시안뮤직어워드(MAMA)에서 3만 9000원짜리 H&M 드레스로 화제가 됐지만, MBC [맨도롱또똣]은 8.8%(닐슨코리아 기준)의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대중에게 레드카펫이란 ‘스타들이 총출동한 한 편의 패션필름’ 또는 ‘신데렐라 놀이’이기 때문에 월등하게 빛난 한두 명에게 인기투표 하듯 임시 여왕의 지위를 하사한다. 그러나 이를 작품의 ‘잼’과 ‘노잼’에 대한 판단 잣대로 삼진 않는다. 김혜수의 파격 드레스가 [타짜], [도둑들], [관상] 흥행의 절대적인 원인이 아니었듯. 대중은 예비 신부가 아닌 이상 평소 입을 일도 살 일도 없는 드레스라는 소비재를 감상만 한 뒤 재빨리 판관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이 냉정한 게임에서 레드카펫 드레스의 마법은 언제든 풀릴 수 있는 시한부 신세이자 단발적인 여흥거리일 뿐이다. 왕자는 더 이상 유리구두 한 짝에 기대 신데렐라를 찾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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