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기사를 읽어야 속지 않아요

2015.12.04
세계 최고의 언론 매체라고 하면 뭐가 있을까?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매체는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최고에 가깝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매체들이 분명 있다. [뉴욕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파이낸셜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가디언] 같은 매체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영미권 최고의 언론사들이다. 이들 중 한국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유일한 매체인 [월 스트리트 저널]이 얼마 전 국내 언론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동안은 한글만 알아도 [월 스트리트 저널]의 좋은 기사들을 읽을 수 있었지만, 이젠 [월 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읽기 위해 영어를 공부해야만 한다. 화제가 되는 외신의 기사가 다음 날 아침이면 국내 매체에 의해 전해지는 상황에서 굳이 영어 공부까지 해가며 외신을 읽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적어도 뉴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감히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영어가 가장 양질의 정보를 방대하게 기록해둔 언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영어 원문 기사를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주 잘못 옮겨 적는 한국 언론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기가 발암물질이라는 WHO의 발표를 기사화했던 사례가 있다. 당시 일부 한국 언론들은 외신이 쓴 기사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원문을 제대로 옮겨 적지 못해 맥락을 완전히 잘못 전달하는 오류를 범했다. 1군(group) 발암물질을 1급(grade) 발암물질로 옮겨 적으면서 실제보다 위험성을 과장해버린 것이다.

빌 게이츠가 사회주의자라는 보도도 있었다. 실제 기사의 출처가 됐던 [애틀랜틱]의 원문에는 사회주의자(socialist)라는 단어가 전혀 없었음에도, 이 기사가 [인디펜던트]의 [i100]에서 한 번 왜곡되고, 그걸 한국의 기자가 애틀랜틱의 원문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하면서 국내에선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은 기사가 되어버렸다. 오보를 내보낸 기자는 [미디어오늘]과의 전화 통화에서 질문한 기자에게 오히려 원문을 읽었느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다행히 지금은 기사가 정정됐지만, 최근 뉴스가 처음 화제를 모은 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기까지의 속도를 생각하면 기사를 초반에 읽은 이들은 여전히 빌 게이츠를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국내 언론들이 외신을 옮겨 적을 때, 원 출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원문에서 자극적인 부분만 뽑아 인용한 다른 기사를 재인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을 언론계 은어로 ‘우라까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뉴욕타임스]에서 최초로 보도한 기사가 있다고 하자. 이 기사에는 보도가 이루어진 맥락과 정확한 사실관계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 기사를 외국의 또 다른 언론 매체—흔히 최초 보도보다는 인용 보도를 더 많이 하는 곳들—가 대중적인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한 부분만 뽑아서 옮겨 적고(1차 ‘우라까이’), 한국 기자들은 그 요약된 기사를 다시 옮겨 적는다(2차 ‘우라까이’). 이렇게 기사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세부적인 내용은 생략되고, 자극적인 부분은 극대화된다.

[뉴욕타임스]의 원문을 읽어본 사람이 두세 번의 ‘우라까이’를 거친 국내 기사를 읽어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오역이 있는 경우에는 헛웃음이 나고, 오역이 없다 하더라도 맥락과 세부 내용이 생략된 자극적인 기사를 보면 내가 읽은 그 기사를 옮겨 적은 기사가 맞나 의심하게 된다. 가끔 원문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사실을 잘못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국내 기사를 읽는 대신, 외신을 직접 찾아 읽게 된다. 영어 원어민이 아니다 보니 외신을 읽는 게 한글 기사를 읽는 것보다 느리고 불편하지만 양질의 기사와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월 스트리트 저널 코리아]의 철수 소식이 특히나 안타깝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모든 기사가 번역되는 건 아니었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 코리아] 팀이 나름의 기준을 갖고 중요한 뉴스 기사들을 옮겨줬기 때문에 적어도 [월 스트리트 저널] 기사를 읽을 때는 부담이 없었다. 영문 독자들이 한 달에 29달러씩 돈을 내고 보는 유료 기사를 무료로, 그것도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한국어로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히 큰 혜택이었다.

양질의 기사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의 수요는 확실하다. 심지어 확실할 뿐만 아니라 강력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국내 매체는 많지 않다. [월 스트리트 저널 코리아]는 그런 독자들의 갈증을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해줬던 몇 안 되는 매체였는데, 이제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헬조선’의 언론 시장은 [월 스트리트 저널]마저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곳이 되어버렸다. 독자들에겐 불행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양질의 기사를 읽고 싶다면 좋든 싫든 영어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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