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는 행복한 시간을 꿈꾸는가

2015.11.27
지난여름, 내가 멤버로 참여하는 소설 리뷰 사이트 소설리스트에서 오픈 1주년을 맞아 밤새 소설을 읽는 행사를 기획했다. 여럿이 모여 각자 책 읽기라는 단순한 아이디어에 ‘밤새’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라는 힘든 옵션이었지만 신청 단계에선 정원의 여섯 배가 넘는 인원이 호응했고 현장에선 놀라운 집중력과 열의를 볼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참석자들은 피곤하기보다 행복해 보였고, 우리가 원했던 건 ‘책의 내용을 읽기’ 그 이상이거나 그것과는 다른 시간의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독자에게 남는 것은 책이 아니라 책을 겪은 시간의 기억이다. 그것은 물론 책 속에 펼쳐진 세계와의 만남에서 비롯되겠지만, 독서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와도 결부된다. 좋은 책을 만드는 것만큼 책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아무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실한 접근법 아닐까. 말하자면 시간의 기획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을 겪는 시간’을 가꾸어나가려는 욕구 혹은 그 필요에 부응하여 변신해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간’을 가진 오프라인 서점들이다. 최근 [지적자본론]을 통해 알려진 일본 기업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의 광역 서점 브랜드 츠타야가 선보이고 있는 전략은 이상적인 예다. 여러 지점 가운데서도 자주 언급되는 T-Site(도쿄 다이칸야마점)는 책뿐만 아니라 DVD, 문구류, 자전거, 카메라, 다이닝 용품 등 삶을 가꾸기 위한 상품을 맥락에 맞게 배열한 문화 편집숍인 동시에 온갖 전문 잡지 백넘버가 열람 가능하고 구입한 책도 즉시 편안한 소파에 앉아 즐길 수 있는 여가 공간이다. 츠타야가 하려는 일은 책 판매라기보다 책이 등장하는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일에 가까우며, 그래서 손님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꾸며진다.

최근 일부 공개된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리뉴얼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책 읽을 공간의 대폭 확보’로 요약 가능한 교보문고의 변화는 방문자들에게 여기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달라고 말을 건다. 공간은 가장 비싼 자원이며 방문자가 오래 머무른다고 매상이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을 아낌없이 무상 제공한다는 것은 그들이 파는 품목이 단순 소비재가 아니라 어떤 시간의 경험이며, 따라서 이에 맞는 서비스를 함께 구성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 판단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면적당 수익성보다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사거나 볼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에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난 뒤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직접 방문해 봤다. 종각 출입구로 들어서자 온갖 기사에 언급되는 그 ‘5만 년 된 카우리 소나무 대형 탁자’가 펼쳐져 있었고 사람이 워낙 많은 시간대라 서점을 한 바퀴 돈 다음에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볼 수 있었다. 30분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독서를 한 다음 일어났다. 이 체험에 대한 솔직한 소감은 그렇게 이상적이지도 그렇게 실망스럽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많은데도 그다지 비좁거나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고, 수험서 코너에 위치해 주변 서가에서 우연한 발견을 할 수 없다는 건 아쉬웠다. 엄마 아빠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책 읽기를 좋은 경험으로 기억하겠구나 싶은 기대가 들지만, 이 장치 하나가 더 많은 책 읽기를 유도하거나 수준 높은 독서 문화를 길러 내리라는 기대는 과도하다.

다만 좀 멀찍이 물러나 커다란 테이블에 수십 명이 둘러앉아 책을 펼쳐놓고 있는 장관을 보자니 리뉴얼은 역시 잘한 일이다 싶었다. 이 물리적 개입은 편의시설의 확충인 동시에 일종의 선언으로, 교보 광화문점의 물리적 위치와 결합하여 ‘도심 한가운데서 독서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또 상징적 위치와 결합하여 ‘(대형)서점은 이제 책 읽는 공간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선언 이상의 성과를 얻으려면 ‘독자’가 무엇이며 누구냐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데이터베이스 축적 및 해석, 더 정교한 메시지 설계를 바탕으로 한 다음 스텝이 필요할 듯하다. 그 방향성은 T-Site를 다룬 한 칼럼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글쓴이는 T-Site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그곳에서 “편리했다기보다 행복했”다고 썼다. 서울의 대형서점도 언젠가 ‘행복한 시간’을 겪을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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