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박찬 “단단함이 저의 가장 큰 꿈이에요”

2015.11.25
보고 쓰는 한 소년의 이야기. 지난 10일 공연을 시작한 연극 [맨 끝줄 소년]은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를 담는다. 하지만 수많은 작가의 이름이 거론되고, 쉽게 쓰인 말이 담은 다양한 상징과 은유는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 확장된 사유 속에서 종종 관객은 길을 잃지만, 이것이 클라우디오라는 소년의 성장기라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부각된다.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은 글쓰기를 통해 욕망을 드러내고, 결핍을 채우고, 비로소 제 발로 일어선다. 전박찬은 [에쿠우스]에 이어 속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소년으로 무대에 섰다. 때로는 당돌하게, 때로는 순수하게 묘한 줄타기를 하는 그를 만나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로운 소년이 글을 통해 단단한 뿌리를 내리듯, 전박찬 역시 연극을 통해 제 삶을 이끌고 있었다.
많은 연극이 그렇지만, 유난히 [맨 끝줄 소년]은 대본을 봤을 때와 연극으로 봤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달랐어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어땠어요?
전박찬
: 이거 정말 부끄러운 얘기고, 만약 관객 중에 이렇게 보고 가신 분이 계시면 제가 정말 잘못한 것일 텐데요. 저 이거 처음에 친구 엄마 꼬시는 내용인 줄 알았어요. (웃음) 너무 멍청하죠. 제가 대본을 잘 못 읽어요. 한두 번 읽어서는 절대 그 대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고, 연습 때 치열하게 고민해서 내가 무대에서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얘기들을 찾거든요. 처음에는 고작 그런 치명적인 드라마로 보다가 나중에는 클라우디오라는 인물이 들어오고, 그다음에 수학과 문학, 그리고 헤르만이 들어왔어요.

작품에 닿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네요.
전박찬
: 엄~~~청난 과정들이 있었어요. 후안 마요르가 자체가 단어나 문장을 어렵게 쓰는 작가는 아니에요. 그런데 점프가 많고 대사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죠. 그래서 혼도 엄청 나고, 이야기가 클라우디오의 글로 전개가 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관객에게 잘 들려야 하는데 안 들린다고 독설도 많이 들었어요. 독백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졸리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요.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초반에는 클라우디오가 글 쓸 때 손으로 뭔가를 쓰는 행위를 많이, 구체적으로도 했었어요. 이게 쓰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이 즐거웠던 건 다 해볼 수 있어서였어요. 어떤 작품들은 배우가 맘대로 해버리면 이상한 작품이 있는데, 이건 어떻게 해도 다 구현이 되더라고요.

스스로 느끼기에 관객들은 잘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전박찬
: 내용을 잘 따라와 주시고, 상상도 기대 이상으로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희가 고민했던 것보다 더 쉽게 받아들이시기도 하고요. 그냥 보여지는 대로 보고, 자기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대로 상상해요.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데, 전에 다른 작품에서도 마지막에 조명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어떤 날은 웃었어요. 어떤 날은 눈물을 흘렸어요. 일부러 오늘은 웃어야지, 어제는 웃었으니까 오늘은 울어야지 이런 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그 의미에 대해 상상할 수 있더라고요. 그게 연극만의 힘이고, 특히 이 작품은 어떤 날 어떤 장면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게 달라질 수 있어서 위험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요.

문학선생인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에게 “독자를 믿어라”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네요.
전박찬
: 종종 관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다는 말을 하거든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사실 헤르만이 하는 “독자를 믿으라”는 말에서 큰 의미를 찾아본 적은 없는데, 이걸 연극으로 치환하면 “관객을 믿으라”라는 얘기가 될 수 있겠네요. 그걸 지금 내가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까 뿌듯하기도 하고. (웃음) 연극은 만드는 사람과 관객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 게 중요하고, 그런 작업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이 공연은 그게 더 강해요. 극에서 클라우디오는 관찰자 입장이라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보다가 객석을 바라볼 때가 있어요. 연습 때 뜬금없이 한번 봤는데 그게 어떤 것들을 발생시키더라고요. 상황에 따라 다른 질감이 만들어지고, 말이 아닌 내가 하는 행위로 클라우디오와 독자 사이, 관객과 나 사이에서 같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생겨요.

객석을 바라보는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 장면 좀 무서울 때가 있어요. (웃음)
전박찬
: 어떤 후기 중에 클라우디오가 싸이코패스 같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글의 요지는 외롭고 순수하기 때문에 글쓰기의 위험함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다는 거였지만요. 저 사실 굉장히 착하고 연약한 남자인데 (웃음) 솔직히 말해서 약간 그런 기질이 있어요. 제가 맘먹고 냉소로 바라보고 있으면 관객들이 정말 그것만 기억하게 될 정도로요. 어릴 때는 없었던 어떤 고집들도 생겼어요. 그리고 무대에서 배우가 그냥 착한 모습만 보여주면 지겨운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실제로 지겨운 모습 많이 보여줬거든요. 이제 더 그러고 싶지 않은 거죠.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제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놨을 때 관객들이 거기에 공감하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에쿠우스]의 알런과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처럼 극 과 극의 소년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성향 때문이었군요.
전박찬: 클라우디오가 외롭고 결핍이 있는 아이라는 건 너무너무 명확하거든요. 연극에서는 많이 드러나지 않지만 원 텍스트를 보면 중간중간에 부모님 얘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가 쓰여진 시점, 아버지의 연령대, 이런 걸 생각하면 더 많은 드라마가 발생해요. 학교를 그만두려 했다는 말도 하고. 그런데 그 외로운 친구가 문학 혹은 글쓰기라는 어떤 선물을 받고 그것을 해나가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위로받아요. 클라우디오는 굉장히 단단한 아이에요. 알런의 매력이 부서질 것 같음이라면, 클라우디오의 매력은 단단함인 것 같아요. 단단함이라는 건 저의 가장 큰 꿈이기도 하고요.

상처를 많이 받는 편인가 봐요?
전박찬
: 어릴 때는 연기를 전공했으니까 당연히 연극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다른 인생도 찬란할 수 있어요. 어느 지점에 그런 것을 잊어버린 거죠. 그래서 재미없어도 재밌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연극을 계속 하면서는 상처도 많이 받고 힘든 시간도 많았어요. 재능이 없는 것 같고,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는 것 같고, 마음이 가난하니까 뭘 해도 재미가 없고, 누가 날 안 불러주면 되게 괴롭고, 연출님이 뭐라 하면 삐치고. 그래서 작업할 때마다 달력에 X표를 쳤어요. 공연까지는 며칠이 남았고, 끝날 때까지는 며칠이 남았다, 이거 끝나면 그만둬야지, 그만두면 뭐하지? 유학 갈 생각도 했었어요.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함이라는 게 있죠.
전박찬
: 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전박찬이라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뿌리가 되게 약해, 잔가지들 사이로 굵은 가가 가끔 나는데 이게 너무 무거워서 이 나무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뿌리가 튼튼하게 내린 것 같아서 이 잔가지들 사이에 약간 다른 굵은 가지가 나도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그 단계를 넘어섰나요?
전박찬
: 어느 날 ‘아, 아직 배우가 아니구나’라고 깨달았어요. 그러다 6.25 양민학살에 대한 [말들의 무덤]이라는 공연 때문에 증언을 직접 들어야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총 5주간 인천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를 들었죠. 듣고 녹취하고. 어느 시점에 이걸 어떻게 아카이빙을 해야 할지 배우 스스로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데 후두암 수술로 목소리가 잘 나지 않는 할아버지가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살던 곳을 잃어버렸고, 같이 살던 사람이 다 죽었고, 가족이 없다. 아,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잃어버렸구나, 아무도 없구나. 서른 명 죽었다고 하면 ‘이건 너무 조금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에 엄청나게 충격을 받으면서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리고 그게 묘하게 극장성과 맞아 떨어졌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여기서 내가 살았었어” 하면 그곳이 되는 거고, 잃어버렸다는 것과도 잘 맞았죠.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싶어서 증언이 아닌 다른 얘기를 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되니까 괴로움과 같이 오는 즐거움이었지만 엄청난 즐거움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정말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만큼, 끝나는 날이 아쉬울 정도로 너무너무 즐겁고 감사해요. 비단 관객이 많아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관객이 잘 보고 있어서만도 아니에요. 소수의 관객과 소통하더라도 저는 즐거운 작업이 최고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작업하는 것 자체가 저라는 인간을 굉장히 단단히 만드는 거 아닌가 싶어요. 좀 더 어른이 되고, 경험이 더 쌓이면 지금과는 다른 단단함이 생기겠죠.

[말들의 무덤]도 그렇고, 극단 코끼리만보 작품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많잖아요. 작품을 선정할 때 ‘사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고려한다고도 했고요. [맨 끝줄 소년]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작품에 끌리는 이유가 있나요.
전박찬
: 그동안 제가 했던 것들이 굉장히 어려운 공연이라 불리는 것들이었어요. 심지어 제 친구나 부모님도 재밌는 공연을 하라고 할 정도였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게 재밌어요. [말들의 무덤] 같은 경우는 준비에만 3년 정도가 걸렸어요. 세계 전쟁의 학살을 공부하면서 너무너무 수치스럽고 괴로운 과정을 거쳤거든요. 물론 많은 관객을 만나는 기회를 잡진 못해요. 재공연을 하면서는 이걸 왜 또 해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고등학생 관객이 공연을 보고 저를 만나고 갔는데 자기는 교과서에서 1950년에 6.25가 있었다는 것만 배웠지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김동현 연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이런 무대에서도 관객은 발생한다.” 이런 관객이 있구나, 그렇다면 이 얘기는 무대에서 해야 되는 거구나, 그 얘기를 내가 할 수 있구나.

체험을 해봐서 연극의 힘을 믿겠네요.
전박찬
: 저는 연극의 힘과 극장의 힘을 굉장히 믿어요. 우리나라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서울 대학로라는 특정 지역에서 연극을 정말 많이 해요. 그런데 극을 보고 나면 관객들은 위로일 수도, 자기반성일 수도 있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저도 관객으로 정말 좋은 무대를 만나면 움찔움찔하고, 너무 재미없는 연극을 만나서 친구들이랑 그것에 대해 싸울 때도 즐거움을 느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고 있는 이런 작업이 정말 정말 소중한 작업이고, 그런 작품들로 다져지다 보니 어떤 작품을 할 때 좀 더 건강하게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잘하고 싶다, 이걸로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는 게 컸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건 인간의 기본 욕망 아닌가요. (웃음)
전박찬
: 어차피 연기 못한다는 얘기 한 번 들으면 10년은 간다고 하거든요. 저 옛날에 정말 많이 들었어요. 스스로도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고. 10년 가기 때문에 연기 못한다는 얘기가 두렵지 않아요. 지금 못하는 건 못하는 거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좀 더 좋은 연기, 좀 더 괜찮은 무대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가는 거죠.

다음에는 [떠도는 땅]에서 ‘귀신 보는 남자’로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들을 계속 연기하는 이유가 뭘까요?
전박찬
: 누가 “너 작품에 키스신이랑 정사신 없으면 안 하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다음 작품에도 애정신이 있어요. 저만 보면 그런 거 시키고 싶은가 봐요. 아이 정말. [에쿠우스]에서는 다 벗고 나왔고, [총체적 난국-곡비]에서는 남자랑 딥키스를 했고, 여기서는 연상의 여인이랑 키스신이 있고. 약간 속을 알 수 없어서 음흉해 보이나 봐요. 지금 소년 하니까 마치 저 소년만 하는 줄 아는데 절대 안 그렇거든요. 저 이제 소년 끝났어요. (웃음) 연극은 영화에 비해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점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소년도 하고, 노인도 하고, 청년도 하고. 연극에서는 그냥 분장 하나도 안 하고 나와서 노인이라고 우기면 믿을 걸요? 제가 무대에서 180cm라고 우길 수도 있어요. 믿게 만들 수 있어요. (웃음) 그렇기 때문에 극장이라는 게 참 재밌는 것 같아요.

아직 관객들이 전박찬이라는 배우에게서 못 본 게 있다면 뭘까요?
전박찬
: 사람들이 저한테 이번 작품 하면서 부쩍 말이 없어졌다, 캐릭터라이징 하는 거냐 그러는데 저 할 거 다 하거든요. (웃음) 극장에 대한 예의라는 게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지점이 있지만, 평소에는 저 정말 그냥 착한 아들, 못된 남자친구 그 정도의 아주 평범한 사람이에요. 무대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늘하고, 속을 알 수 없고? 주변 사람들은 제 속이 어떤지 다 알아요. 티도 잘 나고요. 사실 저에게는 순수하고 청초한 매력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미처 보지 못한 거죠.

청초함이요?
전박찬
: 전에 한 작품에서 기억을 잃은 남자가 길 잃은 고양이에게 다가가고 멈춰 섰다 도망가고 그런 걸 한 적이 있는데, 저 그 작품 할 때 눈도 정말 예쁘게 떴어요. (웃음) 



목록

SPECIAL

image 멜론 차트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