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펙터]의 벤 위쇼, 조금씩 가까워진 별

2015.11.19

상품 설명
벤 위쇼는 한 번도 무명이었던 적이 없다. 데뷔부터가 햄릿이었다. ‘핼리 혜성만큼이나 드물게 나타나는 위대한 햄릿’부터 ‘차세대 로렌스 올리비에’까지, 연기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배우의 재능에 평론가들은 열광했다. 스크린으로의 진출도 곧 이어졌다. [향수]의 그루누이부터 [아임 낫 데어]의 랭보로 변한 밥 딜런까지, 배우라면 누구나 꿈꿔볼 만한 역들이었지만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연기는 아니었다. 평단의 호평은 곧 관객들의 주목으로 이어졌다.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은 순조롭게 오래 남을 이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명인 벤 위쇼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배우였다. 연극과 작은 영화들을 오가며 신중하게 작품을 골랐고, 작품 밖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배역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 20대의 벤 위쇼가 추구했고 또 성취해냈던 업적이었다. [브라이트 스타]의 병약한 시인 키츠를 보며 좁은 아파트에서 고양이털을 치우느라 바쁜 21세기의 런더너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가십성 잡지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의 배우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질감이었다. 관객들은 기꺼이 매혹당했다.

변화의 시작은 BBC [디 아워]였다. 진실을 쫓는 기자 프레디 라이언을 만난 후 그는 조금 덜 슬퍼졌고 조금 더 당당해졌다. 뒤이은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리처드 2세], 그리고 [007 스카이 폴]에서 벤 위쇼는 재능을 확신하는 오만한 작곡가였고, 복수심에 불타는 왕이었으며, 유능한 MI6 요원이었다. 성장의 자연스러운 단계처럼 커밍아웃도 뒤따랐다. 배우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는 신념은 그대로였지만 현실의 그도 더 이상은 모호한 대답 뒤에 숨지 않는다. 그는 이제 영화 [릴팅]에서 비밀을 가진 주인공의 두려움에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다. BBC [런던 스파이]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신하는 동성애자 역을 맡게 되어 개운하다고도 한다. 내면으로 침잠하던 20대를 지나 30대의 벤 위쇼는 뻗어나가고 있다. [패딩턴]과 [007 스카이폴]의 흥행 역시 그의 영역 확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패딩턴]에서의 밝은 기운을 이어나가듯, [007 스펙터]의 Q는 전작보다 활기차고 바쁘다. 그는 007을 돕다가 잘릴 위기에 놓이기도 하고, 틈틈이 신무기도 제작해야 하며, 해킹으로 악당도 막아야 한다. 비중은 여전히 적었어도 블록버스터의 힘은 컸다. 덕분에 매년 영화제서라도 만나게 되면 작은 경사가 났던 한국에서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잔칫상이 펼쳐졌다. [더 랍스터]를 시작으로, [하트 오브 더 씨]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오스카 수상작으로 점쳐지고 있는 [대니쉬 걸]과 여성 참정권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서프러제트]도 각각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긴 기다림 끝에, 늘 멀리서만 빛나던 벤 위쇼라는 별이 드디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성분 표시
연극 50%
수줍고 말 없던 아이 시절, 벤 위쇼는 연극을 할 때만큼은 모든 사람이 한 번은 말할 기회를 갖게 되는 점이 좋았다고 한다. 아직도 그 매력은 여전한 모양이다. 그는 늘 무대로 되돌아간다. 시대를 오가며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한 [프라이드]부터 주디 덴치와 함께 유명 동화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을 연기한 [피터와 앨리스]까지, 벤 위쇼 특유의 직감과 뛰어난 안목은 연극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각지에서 찾아온 팬들을 대하는 그의 다정다감한 매너는 많은 이들에게 눈 딱 감고 런던행 비행기 표를 지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미스터리 30%
벤 위쇼는 전처럼 완벽한 베일에 싸여 있지는 않다. 이제 인터넷 검색 몇 번만으로 우리는 그가 현재의 남편과 [브라이트 스타]에서 만났음을 알 수 있다. 늘 탈수 직전의 사람처럼 커다란 생수병을 안고 런던의 거리를 걷는 사진들도 올라와 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조각들을 아무리 이어 붙여보아도 그는 여전히 미완성의 퍼즐이다. 영화 홍보 시기가 다가와도 그는 토크쇼에 출연하여 친근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자신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털어놓지도 않는다. 정보 과잉의 인터넷의 시대에도 벤 위쇼는 꿋꿋이 버티고 있다. 

스파이 20%
그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 뛰어난 스파이가 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유전적 재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벤 위쇼의 자신감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2차 대전에서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독일인이었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원래 이름은 ‘진 스텔마허’로, 전쟁 후 영국에 정착하며 ‘위쇼’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노출이 심한 직업을 가지고도 이 정도로 신비로움을 유지할 줄 아는 벤 위쇼라면, 벤 스텔마허는 정말로 훌륭한 독일인 스파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취급주의
쫓아오지 마세요
무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벤 위쇼를 짝사랑했다는 코미디언 사이먼 암스텔은 자신의 스탠드 업 코미디 쇼의 초반부를 몽땅 벤 위쇼에 얽힌 일화를 늘어놓는 데 사용했다. 잡으려 할수록 멀어져만 가는 신비로운 생명체 벤 위쇼를 향한 이 눈물 나게 웃긴 구애의 춤을 보면서 잠시나마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느껴보자.  

캔슬은 매너 있게
2012년 [디 아워]의 갑작스런 종영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큰 아쉬움을 남겼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뉴스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제작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시대극은 배우들의 열연과 호평에도 불구하고 두 시즌밖에 만나 볼 수 없다. 끝난 역은 뒤돌아보지 않는다던 벤 위쇼도 [디 아워]만큼은 예외인 모양이다. 그를 포함한 모든 배우들이 언제든지 돌아갈 마음이 있음을 몇 번이고 말해왔지만 무정한 BBC만이 답이 없다.

글. 와조
디자인. 전유림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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