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연 작가 “SF는 ‘지금 여기’를 가장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

2015.11.18
“나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아주 느리게 쓰는 사람이다.” 2003년부터 2015년에 걸쳐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쓴 정소연 작가는 [옆집의 영희 씨]를 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가 느리게 쓴 작은 이야기들은 차이, 장애, 젠더, 공존 등 결코 작지 않은 주제들에 대해 섬세하게 고찰하며 따뜻하게 빛난다. 작은 나라에서 나고 자란 소녀가 생의 모든 시간에 걸쳐 우주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가는 ‘우주류’를 비롯해 그가 쓴 이야기들이 희망에 대한 상상력과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단단히 발을 딛고 있는 것은 정소연 작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SF 소설가로, 번역가로, 그리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궁금했던 정소연 작가를 만났다.

13년 만에 단편집이 나왔다.
정소연
: 예전에 같이 작업했던 편집자분께서 창비 청소년문학 시리즈로 제안을 하셨는데, 작가 입장에서는 특별히 청소년 독자를 예정하고 써온 글들이 아니다 보니 고민이 됐다. 그러다 오랜 지인인 웹툰 작가 조안나 님께 설득당했다. 하나는 청소년 독자도 읽으면 좋겠다는 거, 또 하나는 듀나 님의 [아직은 신이 아니야]도 창비 청소년문학 시리즈라는 거였다. (웃음) 그러고 보니 나도 그걸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무엇보다 출판사에서 여러 지면에 썼던 글들을 전부 다 실어주신다는 게 컸다. 앞으로 더 못 쓸 것 같으니까 지금 정리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더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은 확고한 건가.
정소연
: 처음 단편집을 내겠다고 했을 때는 소설을 더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책 만드는 작업을 하다 보니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재회’는 만드는 도중에 썼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그동안 나라는 사람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여기 실린 것 같은 글은 더 이상 쓰지 못하겠지만, 다른 이야기를 쓸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우주류’는 짧지만 긴 시간에 대한 이야기고, 아주 강렬한 작품이다. 어디서 시작되었나.
정소연
: 초등학교 때 바둑을 배웠는데, 어르신으로부터 “교만하면 수가 나지 않는 법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어릴 때였는데도 기억에 많이 남아서,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유전 공학 연구실에 다니는 대목이 있는데, [전갈의 아이]를 쓴 SF 작가 낸시 파머의 일화에서 착안했다. 화학자였는데 글을 쓰고 싶어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아서 생물학 연구실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도저히 못 하겠다는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과거에 투고했던 작품이 상을 받으면서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된 사람이다. 그런,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해나가는 감정을 ‘우주류’에 붙였다. 모든 글이 나로부터 출발한다 해도 특히 더 ‘나’인 글이 있다. ‘우주류’, ‘마산 앞바다’, ‘처음이 아니기를’이 그렇다.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한 작품씩 썼는데, 그동안 스스로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혹은 이것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정소연
: 나는 내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모른다. 그래서 변한 지점도, 변하지 않은 지점도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1부의 단편들과 2부의 ‘카두케우스 이야기’ 연작은 좀 다른 것 같다. ‘카두케우스 이야기’는 2011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는 상처가 있다.

어떤 상처인가.
정소연
: 로스쿨에 다녔는데 졸업반인 3학년 때 상대평가 제도가 도입됐다. 하위 20%를 떨어뜨리는 방식이라, 어딘가에서 누군가 삐끗해주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원래 공부가 굉장히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간절한 건 하면 됐고,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 유급하면 졸업을 못 하게 되니까, 이 경쟁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감각에 내 삶이 지배당하면서 생긴 상처가 있다. 지옥 같은 한 해를 보냈고, ‘카두케우스 이야기’ 전반에 그 흔적이 있다.

‘재회’나 ‘한 번의 비행’에서 우주비행사들의 졸업시험 비행에 대한 압박감이 드러난 배경을 알 것 같다.
정소연
: 떨어지는 데 대한 공포가 생긴 거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험을 치르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그 공포는 체화된다. 그래서 지금은 학부 전공이었던 사회복지학 석박사 통합과정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평생 공부를 좋아한다고 믿어왔는데, 시험과 평가만으로 이루어진 과정에서 상처받으면서 그 확신이 사라져버렸다. 공부하는 행위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그 지점이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시작했다.

창작보다도 번역가로서 훨씬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열 권 이상의 SF 번역서를 냈고,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는 걸로 아는데 외국어에 대한 흥미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정소연
: 언어 자체를 꽤 좋아한다. 사람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있고, 다른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알고 싶다’는 욕구와 대상의 중간 단계에 있는 게 언어니까, 모르던 걸 알게 된다는 감각이 정말 짜릿했다. 그래서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독일어를 공부했고 얼마 전까지는 프랑스어도 공부했는데 프랑스어는 정말 어렵다. (웃음)

무엇을 알게 되는 게 그렇게 즐거웠나.
정소연
: 역시, 우주다. (웃음) 내가 나고 자란 마산은 애매한 중소도시였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주 큰 세상이 있고, 거기에 대해 모르는 게 아주 많은데, 외국어를 공부하면 알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외국 잡지에서 가끔 우주를 다루면 그걸 읽고 싶어서 영어를 공부했다. 대입 시험을 마친 뒤에는 [스타 트렉]을 열 시간씩 보고, 과외로 번 돈을 SF 원서 사 읽는 데 쏟아부었다.

창작과 달리 번역서의 경우 누군가를 납득시켜서 결과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나.
정소연
: 한국에 나올 필요가 있는가, 내가 할 필요가 있는가. 후자에는 ‘내가 하고 싶은가’도 들어가고, 이때 마음을 움직이는 건 나를 감동시킨 이야기다. 이 외국어를 모르는 한국 독자들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을 고르려고 한다. 특히 청소년서는 의식적으로 찾고 의식적으로 솎아내면서 좀 더 신경을 많이 쓴다.

트랜스젠더 고등학생의 이야기인 [루나](줄리 앤 피터스)를 고르기까지 LGBT 청소년서를 여러 권 찾아 읽었다고 들었다.
정소연
: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책 중 트랜스젠더 개인의 수기,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작품은 있었지만 소설의 형태로 트랜스젠더를 다룬 작품은 찾지 못했다. 줄리 앤 피터스가 그때까지 내놓은 작품을 다 읽었는데, [루나]가 가장 강렬하고 섬세했다. 그리고 [화성 아이, 지구 입양기](데이비드 제롤드)는 입양, 게이, 한 부모 가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떤 작품이든 당사자 독자의 존재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당사자를 향한 메시지가 되기를 원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그런 당사자가 존재한다는 걸 전하고 싶은 마음도 역시 있다. 그래서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 읽었다면 좋았을 것 같은 책을 내고 싶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기뻤던 적도 있나.
정소연
: 많다. 이를테면 [어둠의 속도](엘리자베스 문)는 자폐에 대한 이야기다. 자폐는 사회적으로 은폐되는 장애 중 하나고, 이 작품은 원고지 1,900매 정도로 아주 긴 책이라 시장적으로 어려울 수 있겠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선명했고, 꼭 자폐가 아니더라도 가족 가운데 장애인이 있으신 분들이 오셔서 얘기를 나눠주기도 하셨다.

작업을 통해 꾸준히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지금 여기’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계속 뭔가를 할 수 있는 건가.
정소연
: 나는 SF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는 장르고, 이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투영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SF를 좋아하니까 ‘지금 여기’에 관심이 많은 거고, 뒤집어 말하면 ‘지금 여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SF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 대해 가장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가 SF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SF 창작과 번역 작업을 해왔는데, 4년 차 변호사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직업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정소연
: 사실 몇 가지 이유로 변호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편이라,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이 직업은 내 작품, 작가로서의 나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데, 타인이 나를 볼 때는 직업이 나라는 사람의 너무 많은 부분을 규정해버린다. 다만 로스쿨에 들어갈 당시에는 나라는 사람의 삶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현장에 가까운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작가로서 갖는 의미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했고, 번역가로서 조금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면이 있지만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니까 한 번밖에 살지 않는 인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도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던 거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때 사회적 의미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많지 않을 텐데,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기반에는 무엇이 있었나.
정소연
: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냥 이런 사람도 존재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욕구가 나보다 훨씬 큰 사람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 전쟁에 대한 비유가 내키지는 않지만, 전선이 있다고 하면 정말 맨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고, 나는 그보다는 조금 뒤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이유도 있다. 내가 아무리 이런 사람이라 해도 환경이 받쳐줘야 한다. 당장 먹고사는 게 고민이라면 원하는 일을 하기 어렵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고, 굉장히 존경한다. 그런데 내 경우 부모님이 나를 남과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않으셨고, 학교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다쳤고, 주거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것이 누적되면서 내가 뭔가를 하겠다고 결정하면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유지되어 왔다.

공익적인 활동을 하는 변호사로서 현장에서 마주하는 고통이나 폭력에 대해 절망하거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있나.
정소연
: 그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다. 그동안의 모든 공부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 훈련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큰 비극이 있다면 내 일처럼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 지금부터 탄원서를 씁시다. 육하원칙에 따라서’라고 시스템을 쭉 끌고 나가는 사람도 있어줘야 한다. 그 거리감을 유지하며 돕는 게 이 직업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용기가 있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서 나보다 용감하다. 물론 갑자기 용기가 사라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한 번 용기를 냈을 때 그것을 잡아서 지탱하도록 만드는 게 내 역할 같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변호사를 찾아온다는 자체가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이미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용기를 발견한다는 건 굉장히 멋진 일이다. 그런 게 있다고 막연히 생각하며 살아온 것과, 그것을 실제로 자주 발견하는 건 다르다. 그건 정말,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다.

[싱클레어]와의 인터뷰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안정해지는 변화를 추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을 하든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이 이상을 실현해가는 것인가.
정소연
: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많은 사람이 안전한 사회’,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회’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나에게는 굉장히 선명하게 다가온다. 일상 속에서도 괴로울 만큼 그런 문제를 자주 본다. 그래서 내가 공정하지 않게, 단지 시스템에 유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좀 더 공정하게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계속해서 도울 수도,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도울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어느 순간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것이 내 삶에서 계속되는 ‘일’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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