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환상

2015.11.18

tvN [응답하라 1988]의 덕선(혜리)은 1988년에 가난했었다. 집은 방 두 칸짜리 반지하였고, 어머니 일화(이일화)는 수학여행을 가는 그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반지하에서 사는 전교 999등. 언니 보라(류혜영)처럼 서울대를 다닐 확률도 지극히 낮은 그가 2015년 현재 반지하보다는 훨씬 좋아 보이는 집에서 사는 것은 그의 남편(김주혁)이 가진 경제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988년 이미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당시 전교 1등 선우(고경표), 부잣집 아들 정환(류준열), 당시 1년에 1억 원을 벌던 천재기사 택(박보검) 중 한 사람이다.

[응답하라 1997]은 여주인공이 판사와, [응답하라 1994]는 의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주인공의 가정은 중산층이었다. 반면 덕선은 1988년과 2015년 사이의 인생에서 극적인 반전이 없다면, 결혼이 계층 이동의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린 시절부터 집도, 돈도, 음식도 가족처럼 나눠 쓰던 친구들 중 한 커플이 결혼해서 진짜 가족이 되고, 모두 안정된 삶에 도달하는 것. [응답하라] 시리즈는 끊임없이 이상적인 가족, 더 나아가서 그 가족을 닮은 공동체를 추구한다. 가난한 여자가 좋은 조건의 남자와 가족을 이뤄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것은 많은 드라마의 판타지다. 그러나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중요한 것은 신분 상승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해결책이 가족이라는 데 있다.
 
[응답하라 1988]은 앞의 두 작품보다 어두운 현실을 그린다. 남학생들은 학교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고, 일화와 동일(성동일) 부부의 아들 노을(최성원)은 학교에서 “반지하”라며 놀림을 당한다. 어려운 살림에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동일이 마음을 바꾼다 해도 그가 부유해질지는 알 수 없다. 성균(김성균)과 미란(라미란)이 부유한 것은 올림픽 복권 1등 상금 1억 원이라는 종잣돈을 바탕으로 축적한 결과다. 그나마 가난해도 자식이 서울대에 갈 수는 있었지만, 보라는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과 5회 예고에 따르면 ‘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더욱 가족이다. [응답하라 1994]에서 하숙집 부부가 남의 자식들을 먹이는 것은 넉넉한 인심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응답하라 1988]에서 부유한 이웃이 가난한 이웃을, 가족이 다른 가족의 불행을 끌어안는 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세상을 견디는 필수적인 힘이다.


성균과 미란 부부는 [응답하라] 시리즈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결정체다. 부유한 그들은 비싼 음식을 이웃과 나누고, 덕선이 수학여행에서 쓸 돈을 내주며, 덕선이 과외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응답하라 1988] 제작진은 1980년대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대신 그때는 그것을 가족 공동체와 같은 강력한 연대감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동네면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고, 그 공동체의 누군가는 결혼을 통해 본인도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신분 상승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의 제작진이 주장하는 1980~1990년대의 미덕일 것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과거를 무사히 넘어왔다는 안정감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정서적 힘이다. 그 점에서 [응답하라 1988]은 이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이면서도, 동시에 그 원류를 보여주는 프리퀄이기도 하다.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의 부모들은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시절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운이 좋아서, 뛰어난 자식 덕에, 또는 가족과 같은 이웃의 도움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올 수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은 [응답하라] 시리즈가 단지 과거의 좋은 시절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차라리 대중문화의 창작자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가깝다. 누군가 시대의 문제들을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힘으로 해결했다면, 그것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이런 관점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문제가 왜 발생했는가를 도외시하는 것이 된다. 왜 동일은 보라를 붙잡고 울 수밖에 없는가. [응답하라 1988]은 시대의 문제를 보여주되, 그 문제의 원인과 맥락 대신 해결 방식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가족과 같은 단단한 공동체의 힘이다. 시대의 문제를 개인적인 정으로 이뤄진 공동체를 통해 각자 해결하는 것이다. [응답하라 1988]이 서울 올림픽부터 홍콩영화, 소방차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대중문화를 통해 그 시절의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그 외에는 1980년대의 시대적 정서를 전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의 문제를 부인하지 않되 문제의 근원을 언급하지 않고 개개인의 해결 방식만을 제시할수록, 시대상은 특정 대중문화 콘텐츠나 유행처럼 모두가 아는 것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2015년의 덕선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과거다. 안정된 삶을 사는 현재의 여주인공이 바라보는 과거의 역사. 다시 말하면, 성공한 사람에서 바라본 역사. [응답하라]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2010년대로 오기 전 IMF를 무사히 넘어왔고, 1997년과 1994년을 평온하게 살기 위해서는 1980년대를 넘겨야 했다. 그렇게 [응답하라] 시리즈는 역사를 성공한 자의 시점으로 재편한다. 과거의 고난은 무사히 넘겼고, 현재는 안정적이다. 그러니 과거를 좋은 시절로 회상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을 함께한다. 드라마로서는 완벽한 결말이다. 다만 이것이 진짜 1980~1990년대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환상이다.
 
글. 강명석
사진 제공. tvN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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