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잘못, 평론가의 불성실, 대중의 선택

2015.11.13
10월 23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모티브로 한 ‘Zeze’가 수록된 아이유의 [CHAT-SHIRE] 앨범이 발매됐다. 당일 팬미팅에서 아이유는 ‘Zeze’가 밍기뉴의 시점에서 본 제제에 대한 이야기이며, 제제가 매력 있고 섹시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11월 5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출판사 동녘에서 ‘Zeze’가 소설 속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동의하거나 반박하는 이들의 설전이 벌어졌다. 11월 6일, 하루 만에 아이유 측은 공식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당일 11월 6일, 포털 다음 아고라에는 ‘Zeze’ 음원 폐기 청원이 제기됐다. 11월 10일 동녘 측 역시 자신들의 행동이 적절치 않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Zeze’ 논란은 진행 중이다. 과연 아이유는 정말로 소설 속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걸까. 이것을 해석과 표현의 자유라는 프레임으로만 이야기하는 게 온당한 것일까. 여러 쟁점이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Zeze’를 둘러싼 논쟁은 서로의 입장차만을 확인할 뿐 이 노래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과 평가를 남기지 못하고 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 쟁점들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1. ‘Zeze’를 아동성애를 표현한 노래로 해석할 수 있나
해석의 문제는 결국 얼마나 성실하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가사의 모호함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철저히 콘셉추얼한 앨범인 [CHAT-SHIRE]의 다른 곡들과의 연계 안에서 ‘Zeze’를 읽어낼 필요가 있는 건 그래서다. 타이틀 곡 ‘스물셋’에서 대중에게 소비되는 모습을 나열하며 자신에 대해 ‘맞혀’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유는 대중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의문을 던지되 그건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즉 너희가 아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식의 촌스러운 자립 선언을 하진 않는다. 너희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도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을 보는 이의 “까만 속마음”은 못 보는 게 아니라 단지 “충분히 피곤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안경’). 그는 진짜 자기 모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기보다는, 그건 크게 상관없으며 다만 너희의 눈에 비춰진 내 모습을 나도 알고 있다고 대중과 자신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이것은 쇼 비즈니스 산업 안에서 만들어지는 아이유라는 3인칭 캐릭터에 대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Zeze’ 속 대상은 아이유가 사과문에서 밝혔듯 “가사 속 제제는 소설 내용의 모티브만을 차용한 제3의 인물”, 더 정확히는 [CHAT-SHIRE] 속에서 역시 제3의 인물처럼 다뤄지는 아이유라는 캐릭터로 볼 수 있다.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운 가사 속 제제의 이중성은 “어느 쪽이게?”라고 묻는 ‘스물셋’의 화자와 “모두가 사랑하는 그 여자”와 “모두가 미워하는 그 여자”를 오가는 ‘Red Queen’의 그 여자와 겹쳐진다. 즉 이 노래는 제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가사 속 성애의 대상 역시 다섯 살 소년 제제가 아닌 소녀이면서 또한 섹슈얼하게 소비되던 아이유라는 캐릭터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이런 맥락을 간과한 채 이 곡이 아동성애를 담거나 동의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건 틀렸다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너무 일차원적이다. 제제가 이 노래에 동의하고 말고는 애초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2. 애초에 해석과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제제를 어떻게 다루든 문제없는 것 아닌가.
제제의 동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제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제를 마음대로 이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대해 표범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지만, 그 유비 관계가 적절하고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표범뿐 아닌 누구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아이유가 대중의 시선 속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왜 제제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유추가 가능하다. 제제는 천진한 아이지만 또한 동녘 출판사의 소설 완역판에서 옮긴이도 인정한 것처럼 제제에겐 “작은 악마의 기질”이 있다. 그의 천진함과 악마성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은 정숙하고도 유혹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던 아이유의 그것과 흡사하다. 밍기뉴는 결국 제제의 상상의 친구, 즉 또 다른 자아라는 점에서 밍기뉴를 통해 제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아이유라는 캐릭터를 아이유가 시침 떼고 노래하기에 좋은 장치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소설 속 제제는 가난함과 가족들의 폭력 및 몰이해에 상처 받고 사랑에 굶주린 다섯 살 아이다.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아이가 원하는 사랑과 능동적인 성적 욕망은 같지도 비슷하지도 않으며 비교되는 것부터 문제다. 앞서 말한 몇 가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은유를 위한 대상으로서 제제는 결코 이 노래의 테마와 어울리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실패한 은유다. 파격적일지는 모르지만 대상에 대한 섬세한 결은 놓쳤다. 그리고 때로 어떤 대상에 대해선 얄팍하게 다뤘다는 것 자체가 윤리적인 불성실함이 되기도 한다. 대상을 새로운 의미로 활용하는 건 표현의 자유 영역이지만, 그 활용을 위해 그 대상의 나이와 상처 같은 문제들을 허투루 다루는 건 윤리적 책임의 영역이다. ‘Zeze’는 윤리적으로 불편한 작품이 맞다.


3. 아이유가 ‘레옹’에서 연기하는 마틸다도 미성년인데, 그땐 말이 없다가 왜 ‘Zeze’에서 제제를 활용하는 것에는 민감하게 구나.
둘은 비슷한 듯 전혀 다르다. 우선 원래 텍스트에서 각 캐릭터가 어떻게 활용되느냐의 문제. 적어도 영화 [레옹]은 미성년과 성인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당위를 나름 성실히 그려내려 한 작품이며, 아이유의 ‘레옹’은 이 모티브를 거의 그대로 차용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Zeze’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를 활용하는 방식은 훨씬 자의적이고 윤리적으로도 안일하다. 그 다음은 나이의 문제. 마틸다와 제제 모두 미성년인 건 같지만, 소설 속에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다섯 살 아이와 아저씨(레옹)는 자신의 첫사랑이며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레옹의 질문에 “느낄 수 있으니까”라고 자기 감정의 정체를 자각하는 열두 살 아이를 같은 위치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1번에서 확인했듯, 아이유는 이번 [CHAT-SHIRE] 앨범에서 자신을 정숙한 소녀이면서도 섹슈얼한 이중적 이미지로 소비하던 대중에게 자신 역시 너희의 욕망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 전복적인 면이 있으며 ‘Zeze’의 창작 의도 역시 이 맥락 안에 있다. 하지만 그 의도를 전달하기에 제제는 적합한 은유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결과적으로 ‘Zeze’는 윤리적 문제가 있는 텍스트가 됐다. ‘Zeze’를 [CHAT-SHIRE], ‘레옹’과의 연계 안에서 해석하는 건 중요하지만, [CHAT-SHIRE] 다수 곡과 ‘레옹’이 유의미한 도발을 하는 작품이라 해서 ‘Zeze’ 역시 그렇다고 말하는 건 텍스트의 디테일한 차이를 눈감은 결과다.

4. ‘Zeze’에 대한 음원 폐기 청원은 정당한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작품이 윤리적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비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표현의 자유를 윤리적 대의로 억눌러도 된다는 뜻 역시 아니다. 헛소리를 할 자유와 그 헛소리를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공론장은 건강하고 생산적인 소통을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다. 음원 폐기는 이 전제를 흔드는 최악의 선택이다. 소설 [소원]의 소재원 작가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해석의 자유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지만 “예술로 포장해서 대중에게 보여줬다는 것이 잘못”이며 “예술은 모든 감정을 허용해야” 하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며 음원 폐기를 요청했다. 이것을 한 창작자의 예술론이자 직업윤리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지만 철학자 조지 디키가 1984년 저서 [예술사회]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고래부터 지금까지 예술로 분류되는 모든 텍스트를 아우르는 본질적인 공통점은 없으며, 결국 무언가를 예술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건 제도와 시장이다. 어떤 작품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것은 한 창작자의 작품 윤리가 아닌 공론장 안에서 판별되어야 할 문제이고, 음원 폐기는 아예 그 기회를 박탈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윤리적인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접근해도 마찬가지다. 소재원 작가는 “노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동학대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아동 성범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Zeze’의 윤리성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전체 앨범이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파악할 때 ‘Zeze’ 속 대상을 아이유 말대로 “소설 내용의 모티브만을 차용한 제3의 인물”로 받아들이는 것도 분명 가능하다. 어떤 해석이 더 근거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롭고 치열한 공론장이지, 한 창작자의 창작 윤리가 아니다. 소비자로서 음원을 불매하거나 불매 운동을 벌일 수는 있겠지만, 다른 대중이 해당 작품을 듣고 판단할 권리를 뺏는 건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다. 적어도 스스로 예술을 한다고 믿는 창작자가 할 말은 아니다.

5. 우리는 ‘Zeze’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이슈는 처음부터 입장의 문제였다. 원작 소설을 출간한 동녘 출판사는 원전의 권위로서 아이유에 반대하는 입장을 냈으며, 허지웅을 비롯한 몇몇 평론가들은 해석의 자유를 들어 아이유를 옹호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Zeze’라는 텍스트는 놀라울 정도로 쏙 빠져 있다. 가령 동녘 출판사는 ‘Zeze’의 가사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분석하기보다는 소설 속 제제를 왜곡했다고 성급히 판단해, 원전의 권위를 대행하려 했다. 소재원 작가 역시 “성범죄 아동, 피해 아이들을 직접적으로 보게 되면 절대 그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고 감정적으로 호소할 뿐 ‘그런 표현’의 정확히 어떤 부분이 성범죄를 암시하거나 옹호하는지 제대로 증명하지 않는다. 이런 불성실함은 해석의 자유라는 원론적인 담론으로 아이유를 옹호한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허지웅은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CHAT-SHIRE] 앨범 재킷에서 제제가 신은 망사스타킹에 대해 “망사스타킹을 보고 양파망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해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느냐에 대한 재치 있는 농담이라 해도, 대상을 제대로 해석하겠다고 마음먹은 평론가 입에서 나올 해석은 아니다. 이건 해석이 아닌 자유 연상에 가깝다. 명백히 성적 코드가 담긴 가사가 나오고, 머리가 아닌 다리에 망사스타킹이 신겨졌다면 섹슈얼한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제제를 활용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매체는 어떤가. [디스패치]는 “상상은 금기를 넘어설 수 없다”고 아이유를 비판했지만 정확히 아이유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 분석하기보다는 여러 평론가들의 말을 빌어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입장만을 반복했다. 지금 아이유와 ‘Zeze’를 둘러싼 논쟁은 그 뜨거움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공허하다. 그리고 이것은 작사가로서 아이유가 보인 안일함과 매우 흡사하다. 아이유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소설 속 제제를 맥거핀처럼 이용했다면, 아이유에 대해 말하는 평론가와 작가, 혹은 글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 다수도 자신들이 평소 옹호하던 담론을 말하기 위해 아이유를 활용했다. 창작자와 비평가 모두 불성실했다. 그중 불성실한 창작자는 사과라도 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Zeze’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과연 성실하게 해석할 대상으로 대하긴 했는가. 사실 이것은 입장의 문제 이전에 해석의 문제여야 했다. 지금 필요한 건 논쟁의 종언이 아닌 제대로 된 논쟁의 시작이다.

글.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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