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리티

박기량의 선전포고

2015.10.26

모든 수군거림을 잠재운 한 방이었다. “용서를 하고 싶지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허무맹랑한 내용에 여성으로서 수치스럽지만,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야구장에는 치어리더와 리포터, 배트걸 등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 모두들 야구를 사랑하며 가슴속에 ‘야구인’이라는 단어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나 혼자 용서를 해버리면, 그들 전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만들 수 있다.”([일간 스포츠]) kt wiz 소속 야구선수 장성우는 악의적이며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치어리더 박기량의 입장은 변함없이 “법적 절차에 따라 선처 없이 단호한 대응”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여성이 엉뚱한 루머의 희생양이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 어이없이 오르내렸다. 실질적인 피해자임에도 누군가는 이럴 때 조용히 넘어가는 게 여성으로서 손해 보지 않는 일이라고, 말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쉽게 말하고는 한다. 그러나 박기량은 절대 이대로 끝내지 않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여성과 노동, 야구. 박기량이 인터뷰에서 강조한 이 단어들은 올해로 9년 차 치어리더이자, 스물한 살 때부터 롯데 자이언츠 치어리더 팀장을 맡아온 그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시절 길을 걷다 우연히 치어리더로 캐스팅되었고, “딴따라도 아니고 좀 이상하다”, “그런 계통의 일을 한다고 하면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도 많다”는 가족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냥 춤이 좋아 경기장 단상 위를 지켰다. 흥미가 없던 야구에 애정을 갖게 된 것도 치어리더라는 직업 덕분이었다. 유난히 긴 팔다리를 시원스레 쭉쭉 뻗으며 파워풀한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생글생글 미소를 잃지 않는 박기량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금세 유명해졌다. 치어리더들의 녹록지 않은 노동 환경이 그나마 알려진 것도 그가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한 뒤였다. 한 경기당 평균 세 시간가량 격렬한 춤을 춰야 하는 통에 관절이나 근육 상태는 말짱할 날이 없고, 공격과 수비가 바뀌는 2분 동안 의상을 갈아입고 나와야 하며, 원정팀 응원을 갈 때는 따로 대기공간이 없어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치어리더의 일상이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강도의 노동에도 박기량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몸이 진짜 아플 때도 무대에 올라가서만큼은 까먹어요. 응원이 잘 되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데 그 희열을 잊을 수 없어요.”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는 아니라도, 경기장 한켠에서 맡은 몫을 다한다. 필드가 아니라 단상, 야구가 아니라 춤일 뿐이다. 하지만 남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데다,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곤 하는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 노동자가 제대로 된 존중이나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 언론은 박기량을 비롯한 치어리더들의 사진에 ‘시선 잡는 몸매’니 ‘엉밑살 노출’이니 하는 제목을 달아 공개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마음대로 희롱해도 되는 존재 정도로 인식한다. 박기량은 KBS [해피투게더 3]에 출연해 “아저씨 한 분이 나에게 목마를 시도한다며 아무 말 없이 그냥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놀라서 다리를 확 뗐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라고, MBC [세바퀴]에서는 “치어리더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한 기업의 체육대회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아빠뻘 되는 분이 술 한 잔 따라보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심지어 “경기를 마친 후에는 한 관객이 집 앞까지 몰래 따라와 커피 한 잔을 하자고 제안해 거절한 적이 있다.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무섭더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좋아서, 열정을 다해 성실하게 하는 ‘나의 일’이 허무하게도 누군가에게는 치근거려도 상관없는 구실이 된다. 여성이 짧은 옷을 입고 웃으면서 춤을 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박기량이 장성우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가 워터파크 광고를 찍고, 야구 경기 티켓 판매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인기를 얻고, 각종 TV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며 인지도를 높인 건 치어리더로서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박기량이 누군지는 안다. 그리고 박기량은 점차 유명해지는 것과 동시에 고충을 알리고 편견을 깨 나가는 등 치어리더 업계 전체, 더 나아가 스포츠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루머에 휘말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故 송지선 아나운서, 인터뷰 도중 LG 트윈스 임찬규 선수가 뿌린 물벼락에 맞았던 KBSN 정인영 아나운서 등을 포함해 이것이 어떤 여성 노동자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박기량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키가 큰 자신 때문에 높은 힐을 신어야 하는 팀원들의 수고를 본인의 고단함보다 훨씬 더 강조하며 “저희 친구들”이라고 말하곤 하는 그다운 행보다. 현재 가장 유명한 치어리더로서, 앞으로도 수많은 경기장을 지켜야 할 여성 중 한 명으로서 그가 조금씩 바꿀 세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박기량은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받을 차례다.

글. 황효진
교정. 김영진




목록

SPECIAL

image 장성규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