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슈퍼스타 에이미 슈머가 던지는 다섯 가지 질문들

2015.10.21
평소에는 예의 바른 너드지만 헛소리를 들으면 돌변해 상대방을 납작하게 만드는 티나 페이가 [어벤져스]의 브루스 배너고, 불굴의 의지로 여성들을 격려하며 이끄는 에이미 폴러가 스티브 로저스라면, 혜성처럼 등장한 에이미 슈머는 토르다. 대담하고 웃긴 사람들만 모여 사는 외계 행성에서 우리가 사는 작고 소심한 세계로 어느 날 뚝 떨어진 듯한 이 금발의 장신 코미디언은 인간 세상의 어떤 하찮은 어리석음과 한심함에도 기가 꺾이지 않는다. 어떤 불편한 소재든 갖다 줘보라.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운 후에 ‘하나 더!’를 외칠 테니까. 코미디쇼 [인사이드 에이미 슈머]의 다음 다섯 가지 에피소드는 페미니스트 이슈에서 특히 거침없는 에이미 슈머의 ‘돌직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여성은 성적으로 자유로우면 안 되나요?
풍자는 불평등한 현실에서 더 강한 쪽을 우스꽝스럽게 깎아내려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함에 목적이 있기에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하는 코미디언들은 복잡한 맥락 속에서 언제 자신이 강자인지, 언제 약자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에이미 슈머는 ‘유니버스’가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1세계인의 특권 의식에는 가차 없지만,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노골적으로 묘사하되 여성의 성적 자기주도권 자체는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 여자는 성적인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뜨리는 건 물론이고, 늘 섹시하고 신비롭게 보여야 한다는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대상화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은 비난받아야 한다는 내면화된 여성혐오까지 뛰어넘는 영리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백인 남성의 특권을 꼬집다가도 빵 위의 설탕 시럽이 정액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루이 C.K.는 현자로 찬양하지만, 파키스탄의 마을 하나를 몰살해도 좋으니 성병만은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에이미 슈머를 보고는 저 여자 대체 얼마나 문란한 거야? 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의 함정 카드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하! 앞의 것은 역시 안 물어볼 줄 알았어!


여성은 남성이 보기에 예뻐야 하나요?
있는 그대로도 예쁘니 화장을 지워버리라던 원 디렉션을 꼭 닮은 보이 밴드의 멤버들은 막상 민낯으로 돌아온 에이미를 보자 경악하며 외친다. 화장 다시 해! “카펫 밑에 원목 바닥이 있을 줄 알았는데 더러운 리놀륨 바닥이었잖아. 네 얼굴 얘기 맞아” 같은 노골적인 모욕도 서슴지 않는다. 화장을 하면 ‘쌩얼 미인’이 좋다느니, 화장을 안 하면 여자가 예의가 아니라느니, 늘 남성들의 평가와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의 고달픔을 중독성 강한 노래로 전달한 이 에피소드는 에이미 슈머가 스스로 ‘교묘한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전략의 정수를 보여준다. 여자들이 말을 길게 하면 너무나 싫어하기에 속여서라도 듣게 한다는 에이미 슈머는 제작자이자 작가로서 외부에서 이야기를 통제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어리석고 부조리한 상황에 동조함으로써 관객의 경계를 풀고, 외부의 압력을 내면화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슬쩍 경고한다.


여성은 ‘쿨 걸’이어야 하나요?
‘쿨 걸’이란 단지 성격이 시원시원한 여성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쿨 걸’은 외모는 남자들의 이상적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남자들의 모든 취향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취향을 갖고 있어서 같이 놀기 편하고, 뭐든 웃어넘기는 대범한 미녀다. 에이미 슈머는 결국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한 자신이나 다름없는 비현실적 이상형을 찾는 남자들을 과장되게 보여주면서 [나를 찾아줘]의 작가 길리언 플린 역시 통렬하게 꼬집었던 ‘쿨 걸’ 판타지를 비꼰다. 남자들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를 쓰다가 깨달음을 얻는 여성들은 에이미 슈머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로, 앞 시즌에서는 남자 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해 스트립 클럽에 갔다가 그들이 죽인 스트리퍼의 시체를 혼자 뒤처리하게 된 ‘쿨 걸’이 남녀 간 임금 차이를 깨닫게 되는 공익 광고로 마무리하는 능청스러운 에피소드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나이 든 여성은 쓸모없나요?
[인사이드 에이미 슈머] 세 번째 시즌의 시작을 화려하게 알린 이 에피소드에서 오스카 수상 소감으로 남녀 간 동일 임금과 동등한 권리를 외친 패트리샤 아퀘트와 페미니스트 코미디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티나 페이, 여성 정치인을 주인공으로 한 TV쇼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줄리아 루이 드레퓌스는 슈머 특유의 노골적인 대사들을 베테랑들답게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며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유효 기간’을 조롱한다. “샐리 필드가 톰 행크스 애인으로 나오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 됐던 거 알지?” “남자들은 유효 기간 없어. 거기서 흰 거미가 나올 지경이 되어도 계속 써주니까.” 30대의 여배우가 50대 남배우의 상대를 연기하기에 너무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현실을 조롱한 이 에피소드는 유튜브에서만 4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페미니즘이 더 이상 대기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하위 이슈가 아님을 입증하는 시기적절한 일침이었다.


강간은 당하는 여성의 잘못인가요?
고등학교 풋볼을 소재로 한 드라마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츠]를 패러디한 이 에피소드에서 에이미 슈머는 강간을 방조하고 용인하는 문화를 거침없이 조롱한다. 새로 온 코치의 강간 금지령에 선수들이 반발하며 던지는 질문들을 보자. “여자애가 평판이 별로라서 아무도 안 믿을 텐데 그래도 강간하면 안 되나요?” “여자애가 처음엔 좋다고 하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마음을 바꿔도 안 된다고요?” 지금 당장 성교육 자료로 배포해도 좋을 이 에피소드와 비디오 게임 형식을 빌려 여성이 강간을 당해도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직설적으로 꼬집은 또 다른 에피소드를 두고 한 여성 언론인은 “에이미 슈머는 코미디라는 브라우니 안에 페미니즘 당근을 넣어 내놓고 있다”는 재치 있는 찬사를 보냈다. 2014년, [인사이드 에이미 슈머]에서 어려운 문제를 대담하게 다루고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전달한 공을 인정받아 피바디 상을 받은 에이미 슈머는 우리끼리 몰래 페미니스트 쇼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금방 알아차려서 기쁘다는 수상 소감을 남기면서, 여군 강간 문제를 다룬 에피소드를 쓴 여성 작가에게 “고맙다 이년아!”라는 호쾌한 감사 인사를 보낸다. 시크릿 페미니스트 닌자에서 페미니스트 슈퍼스타로 거침없이 진화 중인 에이미 슈머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Thanks, bitch! 

와조
웃긴 얘기 보고 심각한 생각 하는 걸 좋아합니다. 틈만 나면 영화와 TV쇼를 봅니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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