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앨범 다섯 장

2015.09.07
인생이란 예측불허지만 최근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은 떠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 와중에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한국 음악 역사에 남을 중요한 음반 녹음을 진행 중이다. 물론 정명훈 예술감독과 서울시향의 관계에서 아직 결정된 사안은 없다. 다만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정명훈의 서울시향 연주를 담은 다섯 장의 음반을 소개한다. 지금까지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이치 그라모폰(이하 DG) 레이블 발매음반은 총 9장이고, 계약한 10장의 음반 중 단 1장(브람스 4번 교향곡)만을 남겨두고 있다. 발매된 음반의 현황과 구입처는 서울시향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1. 클로드 드뷔시: 교향시 ‘바다’ / 모리스 라벨: 어미 거위 모음곡, 라 발스 (2011. 7월)
DG와 계약한 뒤 처음 출시된 기념비적인 음반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정명훈의 장기인 프랑스 음악 중 비교적 친숙한 관현악곡들을 담았다. 한국에서 프랑스 음악은 독일/오스트리아에 비해 평가 절하된 경향이 심한 데다 실제로 프랑스 작곡가의 곡을 제대로 소화해 낼 오케스트라도 드문 현실에서 이만한 성취를 이룬 녹음이 정식으로 발매됐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프랑스 인상 음악을 대표하는 드뷔시의 ‘바다’와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은 아름다운 색채와 아기자기한 짜임새를 느낄 수 있는 음악들로, 페로의 동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라벨의 ‘어미 거위’는 악기 소리로 표현되는 여러 의성어가 특히 예쁘다. 다섯 개의 동화 내용을 알고 들으면 보다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트랙으로 실린 라벨의 ‘라 발스’는 제목 그대로 신나는 왈츠고 서울시향이 작정하고 신명을 내면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따라올 수 없다는 정 감독의 평가가 단번에 수긍이 갈 정도로 경쾌하게 내달린다. 


2. 표트르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2012. 8월)
차이콥스키의 ‘비창’은 몇 년간 부단히 반복하며 앙상블을 다듬어온 결과물이다. 2014년 초청받은 영국 BBC 프롬스에서도 이 곡을 연주해 현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비창 교향곡은 제목 그대로 비장한 서두로 시작해서 시종일관 깊은 슬픔의 정수를 끌어내는 곡인데 차이콥스키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과 드라마틱한 전개가 서울시향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3악장의 전력질주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채 4악장으로 넘어가 서서히 스러지듯이 조금씩 가라앉는 결말까지 나무랄 데 없는 응집력을 보여준다. ‘무조건 힘과 격렬한 감성으로 부르짖는 게 아니라 약간 힘을 빼면서도 곡이 가진 비극성을 부드럽게 살려낸 것을 높게 치고 싶다’는 주변의 평. 감정의 밑바닥까지 다 쏟아내면서 비창 교향곡이 끝나면 마지막 트랙인 라흐마니노프의 관현악 소품 ‘보칼리제’가 기다리고 있는데 치밀어 올라 분출할 데가 더 이상 없는 슬픔의 여운을 조금씩 다스리며 위안을 주는 효과가 있다. 


3. 진은숙: 3개의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협연: 김선욱) / 첼로 협주곡 (협연: 알반 게르하르트) / 생황 협주곡 (협연: 우 웨이) (2014. 6월)
서울시향 상임작곡가이자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진은숙의 협주곡 세 개를 모은 음반. 무엇보다 이전에 정식 녹음이 없는 레퍼런스 음반이라는 점에서 서울시향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 음반은 2015년 올해 영국 BBC 뮤직매거진국제 클래식 음악상(ICMA)의 현대음악 음반상을 받았으며 9월 27일에 발표되는 그라모폰상의 현대음악 음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음악으로 정기 공연도 힘든 마당에 음반 녹음까지 낸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관건이다. 서울시향은 몇 년간 꾸준히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노바’를 진행해 왔고 이 음반은 그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현대음악을 못 듣겠다 싶은데 억지로 들을 이유는 없지만 혹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영화를 흥미롭게 봤다면 그 영화의 마지막 10여 분에 깔리는 죄르지 리게티의 ‘atmospheres’가 20세기의 대표적인 음악인 것도 알아두면 좋다. 진은숙은 바로 그 리게티의 제자였고, 얼마 전 타계한 영화음악 작곡가 제임스 호너도 리게티의 제자였지만 현대음악으로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영화음악에 뛰어든 이력을 갖고 있다. 현대음악을 듣다가 ‘영화음악 같다’는 소리가 나오면 너무 뻔한 전개라는 의미로 놀리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영화음악을 깔보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음악은 동시에 훌륭한 현대음악이기도 하다. 현대음악이라고 무조건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기피하지 말고 작정하고 귀를 기울여 리듬과 악기 소리가 서로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앙상블에 집중해보라. 들으면서 연상되는 어떤 장면이 있으면 더 좋다. 상상력은 이런 데 쓰는 것이다.

진은숙의 작품 중에서 평가가 높은 곡은 기악보다는 성악곡인데 음반을 들어보고 진은숙 작곡가의 작품에 흥미가 생긴다면 베를린 필의 실황 연주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예술감독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말의 유희’‘사이렌의 침묵’, 그리고 정명훈이 지휘한 ‘첼로협주곡’ DCH(유료)에 올라와 있다. 


4.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9번(2014. 12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이후로 작곡가들에게 9번이라는 의미는 죽음을 의미하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는데 말러 역시 9번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10번 교향곡의 1악장을 쓰다가 생을 마감했다. 남아있는 스케치를 토대로 되살려낸 음악학자 데릭 쿡의 10번 교향곡은 음반 녹음이나 연주도 활발한 편이지만 아무래도 작곡가가 완성한 게 아니라 진짜 말러의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말러 교향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9번은 길고 파란만장했던 작곡가의 삶과 연결해보면 그 의미가 남다른데 행복했던 결혼생활이 비극으로 끝나고 사랑했던 딸의 죽음과 현실에서 원하는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작곡가로서의 회한 같은 것들이 깊고 넓은 강물을 따라 부질없이 흘러가는 관조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영욕의 삶을 돌이켜보며 찬란했던 시절을 잠시 꿈꾸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남은 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안식뿐이다.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말러 9번 교향곡은 악단의 연주력이 최절정에 이른 지점에서 녹음됐고 결과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포르테시모와 피아니시모의 완급조절이 무의미한 국내 오케스트라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격렬한 슬픔과 아련한 비극의 여운을 서두르지 않고 가감 없이 충실하게 그려낸다. 


5.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5번(2015. 7월)
말러 교향곡 중에서 1번과 5번은 내한하는 해외 오케스트라들도 가장 자주 연주하는 편이고 국내 오케스트라들도 개중 도전할만한 규모다. 2번과 3번, 8번은 대규모 합창단과 어린이 합창단이 동원되어야 하고 성악 솔리스트의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4번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앙상블이 몹시 난곡이라 어지간한 오케스트라는 시도하기 힘들다. 1번과 5번 교향곡은 그중에서 도전할만한 곡이라고 했지만 도전한다고 잘 소화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말러 교향곡은 후기 낭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연결하면서 현대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기본적으로 대편성이고 그만큼 정교한 앙상블이 요구된다. 합창과 솔리스트의 독창이 빠진다 해도 연주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다. 서울시향의 5번 교향곡 실황은 9번에 이은 또 하나의 뛰어난 성취다. 9번도 5번도 이미 수많은 명연주 음반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향의 음반을 들어볼 이유를 꼽아보자면 역시나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족할만한 완성도의 녹음이라는 점, 세상에 아무리 명반이 차고 넘쳐도 새로운 음반은 계속 나올 것이고 그 많은 음반 중에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음반도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나. 물론 그런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이 음반은 꼼꼼히 들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감수 도와주신 분들: @genrokuen, @byundaeri1(트위터)

오경아 (만화가)
2011년부터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 연작 만화 [침묵의 음악] 웹사이트(windsisle.tistory.com)에 연재 중.




목록

SPECIAL

image Mnet 악행전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