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 그대로의 보아

2015.05.27

당신에게 보아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는가. 우주복과 땀복을 반반 섞은 듯한 옷을 입고 아직 성글지도 않았을 관절이 걱정스러울 만큼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던 13살 소녀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의 믿음직한 심사위원이자 SM 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담당 비등기 이사까지. 데뷔 후 어느새 흘러버린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보아는 대중 각자의 추억에 따른 다양한 시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보아의 8번째 앨범 [Kiss My Lips]는 그 서로 다른 타임라인 가운데 지난 15년 간 묵묵히 그녀의 곁에서 성장을 지켜봐 온 오랜 팬들의 기억이 모인 집결지에 자리 한다. 앨범 전체의 프로듀싱은 물론 전곡의 작사‧작곡까지 스스로 해낸 이번 앨범은 한국, 일본, 미국 등 한국 뮤지션이 정식으로 노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장에 도전하며 이젠 그 어떤 성공과 실패에도 담담해진, 그저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 춰온 가수 보아 그 자체처럼 보인다.

최근 SM과 활발한 협업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더 언더독스나 스테레오타입스, 조금은 의외의 이름 정재일까지, 활동 반경도 장르도 다른 뮤지션들의 이름이 즐비하지만 그들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조력자 그 이상이 아니다. 대신 앨범을 관통하는 코드는 단 하나, 보아 자신이다. 보아 하면 자동 검색어처럼 따라 붙던 배기팬츠와 운동화가 사라져 어색하다는 이들도 있지만, 이런 변화의 전조는 한층 부드러워진 스타일로 대중에게 한 뼘 더 다가섰던 7집 ‘Only One’에서 이미 충분히 노출된 상태였다. 다양한 후배들과의 협업과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타진하는데 성공한 이 곡은 8집의 선공개 곡이었던 ‘Who Are You’로 흐름을 능숙하게 이어가며 새 앨범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 탄탄한 디딤돌 위에 보아로 시작해 보아로 끝나는 새로운 세계가 무사히 내려앉는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리듬 앤 블루스를 바탕으로 춤을 위해 보다 강한 비트를 다양하게 배치하는 보아만의 시그니쳐 스타일이다. ‘Fox’나 ‘Double Jack’, ‘Green Light’, ‘Blah’ 등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하는 넘버들이 대부분 이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데, 언제 어디서나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팝 넘버들인 한편 요즘 가요계에서는 의외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스타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만히 듣고 보자니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하모니를 맞춰 나가는 발라드 ‘Love and Hate’나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이 곡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Hello’도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처럼 반갑다. 타이틀 곡 ‘Kiss My Lips’ 역시 마찬가지다. 다소 어둡고 섹시한 무드가 곡 전체를 누르는 가운데 보아는 그 흔한 훅이나 지르는 파트 하나 없이 4분 여 간 뭉근하고 끈덕지게 청자를 유혹한다. 사운드, 멜로디, 가사 모든 면에서 요즘 K-POP 팬보다는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쏟아진 J-POP에 익숙한 이들이 친숙하게 느낄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그래서 낯설고 생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면, 그것은 이 앨범이 앞서 말한 대로 보아 그대로의 보아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Kiss My Lips]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치밀한 프로덕션 하에 완성된 기획 앨범이나 최신 유행을 따르는 류의 앨범이 아니다. 조금 낭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3살 소녀가 20대의 끝자락에 닿을 때까지 직접 몸과 마음으로 부딪혀 축적해 온 시간이 빚어낸 보물 상자 같은 그런 앨범이다. 앨범에 수록된 12곡 모두는 우리가 태어나 처음 듣는 노래들이지만, 그 멜로디와 리듬 사이 우리가 기억하는 보아의 모습이 수 없이 박혀 빛난다. 10대라고 믿을 수 없는 춤 실력과 가창력으로 온 열도를 놀라게 했던 ‘Listen To My Heart’, 사랑스런 10대 소녀의 자부심이 반짝이던 ‘Shine We Are’, 미국 시장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찼던 ‘Eat you Up’, 여왕의 귀환과도 같았던 ‘Hurricane Venus’까지. 파노라마로 지나가는 인생의 한 컷 한 컷을 자신의 의지대로 나열하는 보아의 손끝이 더 없이 가볍고 즐거워 보인다.

그녀는 이번 앨범을 설명하며 “이제는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을 보여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줍지만 자신의 앨범은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모든 분석과 판단을 마쳤다는 듯 강단 있는 말투. 자신의 현재와 원하는 방향, 그리고 그 방향을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방식까지 안정적으로 체현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균형 감각이 귓가를 스친다. ‘Kiss My Lips’ 무대의 하이라이트, 푸른 깃털 속 꽃처럼 피어나는 보아의 얼굴에 이곳이 어디든 네가 누구든 나의 춤과 노래로 널 사로잡겠다는 야심으로 불타오르던 열세 살 소녀의 눈빛이 문득 스친다.

글.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사진 제공. SM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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