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미완의 시대], 가장 별스럽고 독특한 20세기 역사서

2015.05.22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였나, 표지만 보고 단박에 마음을 빼앗겼던 책이 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쓴 [혁명의 시대]. 세상에 불평불만 많고 혁명이 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혁명이라면 덮어놓고 좋아했던 10대는 그 불온한 제목에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 대학생이 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들었는데, 어라? 뭐야 이거? 혁명은 원래 막 피가 끓고 다 뒤집어엎고 그런 거 아니야? 세상에나 그렇게 난해하고 지루할 수가. 피 끓는 청년 반골을 제목으로 낚아서 단박에 식혀버리는 역사가라니 체제 수호의 첨병일세.

낚시라면 대단히 성공한 낚시였다. 내 책장에서 홉스봄은 단일 저자로는 단연 최대 비중이다. 이 1917년생 영감님은 그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이면서, 고집불통에다 반골 기질로도 지성계에서 손에 꼽힌다(단지 문장만 따분할 뿐이다). 자기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라고 부르는 패기, 공산주의 파산 후에도 평생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았던 고집불통,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반골,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신랄한 영국식 유머… 내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흥미를 못 느낄 때도 홉스봄의 책은 나오는 대로 사들였다. 그건 공부가 아니었다. 스스로는 반골이 못되지만 지조 있는 반골에 대책 없이 끌리는 내게는, 그러니까 ‘덕질’이었다.

기자가 되고 나서는 생각날 때마다 검색창에 ‘홉스봄’을 쳤다. 2012년 10월 1일,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대비하던 타계 소식이 떴다. 하필 한창 대선 국면이었다. 따로 시간을 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날밤을 새서 부고 기사를 썼다. 한쪽을 준다는 걸 막무가내로 세쪽을 썼다. 이 대가의 삶은 자체로 20세기의 압축파일이어서 부고만으로도 20세기를 일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때처럼 기사를 잘 쓰고 싶었던 적도 흔치 않다. 그 왜 덕업일치라고.

‘덕후’로서 말하자면 이 장르는 진입장벽이 높다. 유일한 예외가 있는데, 자서전이다. 러시아 혁명의 해에 태어나 시장진영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살다가 소련 붕괴까지 지켜본 역사가는, 개인사를 씨줄로 인류사를 날줄로 발걸음 가볍게 20세기를 종횡무진한다. 학술서에 못 쓰던 본심을 자서전 핑계 삼아 쏟아내는 느낌마저 든다. 체 게바라를 조롱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런 삐딱함을 그동안 어지간히 억눌렀구나 싶어 한참을 웃었다. 평생 써왔던 글과는 아예 다른 글쓰기다. 심지어 문장마저 짧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 장르를 영업하는 중이다.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는, 내가 아는 가장 균형 잡힌 20세기 역사서와는 거리가 멀지만, 내가 아는 가장 별스럽고 독특한 20세기 역사서다. 개인의 삶과 인류의 한 세기를 한 데 엮어 풀어낼 증언자로 이 영감님보다 어울리는 사람을 떠올리기는 무척 어렵다. 물론 자서전답게 대놓고 편파에 주관 덩어리다. 하지만 이 대가는 편파와 주관을 다루는 방법에서마저도 대가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썼다. 2014년 11월부터 사회 기사를 쓴다. 농땡이를 보다 못한 조직이 발로 뛰는 부서로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확하다.

디자인. 전유림




목록

SPECIAL

image 박나래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