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 명필름 대표 “내게 영화는 더 어른스러워지기 위한 자양분”

2015.05.22
명필름은 1995년 [코르셋]을 시작으로 [화장]까지 총 36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는 남북 분단의 문제를 다루며 큰 성공을 거둔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한국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했던 [건축학개론]과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카트] 등으로 다양했다. 또한 국내 최초로 저작권료를 지불한 후 외국곡을 OST로 사용했고, 모든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작품 역시 명필름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난 달 30일, 경기도 파주시에 명필름영화학교와 명필름아트센터가 문을 열었다. 명필름의 20년은 한국 영화가 그래도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명필름의 대표 심재명을 만났다. 한국 영화계에서 조금씩 더 새로운 일을 해서 더 좋은 방향을 추구하는 그가 영화를 위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종로구 필운동에 있던 사옥을 파주로 옮겼다.
심재명
: 10여 년 전부터 파주 출판 협동조합에서 1단계로 출판사, 2단계로 영화 관련 업체들이 입주해 파주출판단지를 조성해나갈 계획을 짰다. 이곳에 영화사, 영상 자료원, 사운드와 편집 및 특수효과 회사들이 함께 모여서 할리우드 스튜디오처럼 영화의 출발부터 완성까지 원스톱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거지. 영화사 집이나 영상 자료원도 근처에 건물을 짓고 있다.

얼마 전에 개관한 명필름영화학교 학생들도 이곳에서 모든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겠다.
심재명
: 그렇다. 학생들이 학교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운드와 편집 작업을 할 수 있다. 파주에 시각디자이너 안상수의 디자인 전문학교 파티도 있는데, 영화를 만들 때 이들과 협업을 할 수도 있다.

입학하는 10명의 학생들은 숙식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받게 되는데, 선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나.
심재명
: 일반 대학의 영화과와 교육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모든 학생에게 데뷔할 기회가 주어지고, 커리큘럼은 곧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학력, 성별, 나이, 국적 상관없이 얼마나 치열하게 영화에 대한 꿈을 준비해왔는가에 주목했다. 가령 사운드 분야를 지망한다고 하면,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보다는 이 분야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준비했는지를 봤다. 졸업작품 예산에 제한이 없고, 명필름 고유의 영화 정신과 그간 함께 작품을 만들어온 영화 장인들의 경험을 직접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명필름아트센터에는 영화를 상영하고 뮤지컬 공연을 할 수 있는 곳 외에 건축이나 미술 등 다른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도 있다.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필름이 영화를 하는 태도를 구체적으로 반영하고자 했다.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녹여내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이 공간에 녹아 있다.

그런데 처음 1년간 학생들은 교양 수업을 듣는다. 어떤 내용인가.
심재명
: 인문, 사회, 철학, 역사, 경제 경영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수업을 한다. 가령 현대사는 한홍구 박사님이 가르칠 예정이다. 이렇게 1년간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을 쌓고, 그다음 1년 동안 실제로 영화를 촬영하고 완성하고 개봉 준비를 한다.

이런 소양들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심재명
: 영화를 기술적으로 잘 만드는 것만큼 사회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일을 해오면서 세상에 던지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 계속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식은 없고 재능만 있다면 삶과 인간, 시대에 대해 별로 고민이 없다. 처음 1~2편은 뛰어난 작품을 만들지만 이후 영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출전공자를 뽑을 때는 시나리오만 봤다. 그 시나리오로 졸업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잘 살아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반대로 의식만 있고 재능이 부족한 창작자에게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심재명
: 물론 그 두 개가 모두 있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영화는 공동 창작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할 수 있다. 명필름영화학교에는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표현으로 영화 장인들이 함께한다. 그들이 일대일로 영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다. 입시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중점적으로 본 것은, 강렬하고 의미 있는 주제를 담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를 완성도 있게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선배들이 도와주는 시스템이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을 통해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 건가.
심재명
: 한국 영화계에 필요한 영화들을 만드는 것. 어떤 장르든, 비주류 영화든 상업영화든 따지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감독이나 작가의 생각을 좀 더 잘 담아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창작자가 아니라 그 옆에서 돕는 사람이다. 감독이나 작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후 미로 속에서 헤매는 이야기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령 [건축학개론] 같은 경우 이용주 감독이 여러 투자사나 영화사를 거치면서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했었는데, 명필름과 만나 1년 동안 함께 고치면서 10년 전에 썼던 초고에 가까워지게 됐다. 감독이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돌아간 거지.

창작자의 개성을 강조하다 보면 아무래도 프로젝트의 위험 부담이 커질 수도 있는데. 제작자로서 투자를 보전하기 위해 모험을 억누르는 부분은 없었나.
심재명
: 그러지 못해서 문제였던 것 같다. (웃음) 남들은 “그게 잘되겠어?” 하는 기획에 더욱 오기가 발동한다. 그중에는 [시라노: 연애 조작단], [건축학개론]처럼 결과가 좋았던 작품도 있지만, 최근 [관능의 법칙], [카트], [화장]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래서 반성도 했다.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더 치열하게 했어야 했다. 다만 [카트]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대형 마트라는 공간을 제대로 구현해내야만 했는데,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배우들이 개런티를 낮추고 노무 출자 방식으로 참여한 만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더라면 더 보람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러면 왜 [카트]를 만들어야만 했을까.
심재명
: 의무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을 정리한 르포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 사회를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은 대표가 있던 장산곶매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을 다룬 [파업전야]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감정 노동자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됐고 그런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그간 상업영화에서는 비정규직 감정노동자, 거기에 여성이 주인공인 노동 영화가 거의 없었다. 저예산 독립영화가 아닌 주류 진영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동시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인데, 2015년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심재명
: 경제적 가치가 가장 우선시되고, 젊은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다.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90년대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인기를 얻은 것은, 그때가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90년대 학번들을 중심으로 당시 젊은이들이 누렸던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지금 다시 복귀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요즘 이런 생각도 한다. “지금 [공동경비구역 JSA]가 다시 나오면 그때만큼 흥행이 될까?” 최근 [국제시장]이나 방송 프로그램들을 보면 부성애 중심, 남성 중심의 콘텐츠들이 호응을 받고, 전 세계적으로도 점점 보수화되고 있지 않나. 특히 최근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더욱 여성이 살기 힘든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존재를 증명하기 힘들어지니까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분풀이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권력자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화가 많이 났다.

그러면 영화 제작자로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심재명
: 여성 간의 연대를 위해 보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런 게 부족하지 않나. 명필름은 그간 했던 36편의 영화 중 다른 제작사보다 여성 감독과 많이 작업을 해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제작자들도 영향력이 있을 때 여성 감독이나 프로듀서들에게 기회를 주는 식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회를 주고 같이 작업을 하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서 여성 인력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여성 영화가 없고 여성 감독이 없냐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실천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런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까.
심재명
: 글쎄, 영화라는 매체를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2시간 영화를 봤을 때 그 시간이 낭비였다는 생각만 들지 않으면 되는 것 같다. 영화적 재미든 기술적으로 새로운 시도든 해보지 않은 주제를 세상에 내놓아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정도. 다양한 영화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그럴 수 있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의 보수적인 영화, 켄 로치 식의 진보적인 영화가 모두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장르 영화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가 모두 나올 수 있는.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도, 먹고사는 일도 영화를 통해서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심재명
: 영화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영화를 하면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에 임권택 감독님과 [화장]을 함께 하면서도 많이 배웠다. 감독님 앞에 서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웃음) 나는 20년 동안 36편 만들면서 지치고 포기할 때도 있었는데, 60년간 100편 넘게 만드신 감독님은 날씨나 스태프의 상황 같은 것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있을지언정 본인에 대한 것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정답이든 오답이든 끝까지 자기 앞에 놓인 숙제를 하려고 한다. 또 영화라는 매체 앞에서 그렇게 겸손하실 수 있다는 것도, 손자 손녀뻘인 스태프들에게 존댓말을 하신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내가 다음 영화를 할 때 필요한 자양분이 된다. 어른스러워지기 위해서, 더 조심스러워지기 위해서, 하지만 꼰대는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면서. (웃음)

글. 임수연
인터뷰. 임수연, 위근우
사진. 김도훈(KoiWorks)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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