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여자 스파이가 뒤집어버린 판

2015.05.20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생각하는가. [스파이]는 여자의 적은 물론 상사와 동료까지도 모두 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현장 요원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CIA 내근 분석가 수잔 쿠퍼(멜리사 매카시)는 여성 상사의 명령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여성인 악당에게 접근해 여성 동료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다. 물론 [스파이]에는 수잔 쿠퍼가 짝사랑하는 대상, 그녀를 방해하거나 돕는 동료들, 악당 주변의 인물들까지 다양한 매력을 가진 남성 캐릭터들도 곳곳에 있다. [스파이]는 남성들을 영화에서 지워내는 대신 지워지거나 거의 흐릿했던 여성 캐릭터들을 그저 조금 더 앞으로 끌어낸 것만으로도 사뭇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한다.

멋진 슈트와 자동차, 취향이 드러나는 한 잔의 술. 냉전시대가 끝난 뒤 제임스 본드부터 [킹스맨]에 이르기까지 스파이는 대부분 멋진 남성 캐릭터를 재생산하기 위한 장치였다. [스파이]에도 금발 미남으로 적군과 아군을 불문하고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무기로 활용하는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과 불사조에 가까운 초인적인 능력을 주장하는 릭 포드(제이슨 스타뎀)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스파이]에서 모든 것을 용서받던 주인공이 아니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우스꽝스러워진다. 이들이 비워준 자리에서 활약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자 ‘스파이’ 수잔 쿠퍼의 몫이다. 이 말 많고 덩치 큰 여성에게는 이성을 홀리는 치명적인 매력이나 기상천외한 첨단 무기도 없다. 본부는 줄곧 그녀의 재능을 의심하고, 비슷한 이유로 악당들은 좀처럼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잔 쿠퍼는 고양이를 키우는 싱글, 다단계 판매왕인 주부 등 언더커버로 주어지는 나이 많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여성성을 긍정하고 즐긴다. 영화는 수잔 쿠퍼의 외모를 부정하지 않지만, 외모를 놀리는 것을 차치하고도 그녀를 통해 웃음을 구현할 수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처럼 판을 뒤집어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스파이]의 감독 폴 페이그와 그와 세 편의 영화를 함께 한 멜리사 맥카시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폴 페이그는 성인용 코미디인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통해 여학생들에게나 허용되던 여성 집단 코미디의 한계를 극복하며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를 선보였고, [히트]에서는 껄렁한 경찰과 깐깐한 FBI 요원이 의기투합하는 형사버디물에 여배우인 산드라 블록과 멜리사 맥카시를 기용해 두 캐릭터가 보여주는 전형성을 남성이 아닌 수사관의 특징으로 해석하는 시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사이 멜리사 맥카시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에서 꾸밈새라고는 없는 모습으로 비호감을 전담하던 캐릭터에서 [히트]에서는 훌륭한 외모가 아니지만 나름의 매력을 인정받는 액션 영화 속의 아저씨 캐릭터를 계승받고, [스파이]에서 남성이 연기하던 스파이 캐릭터의 전형성을 뒤집는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조스 웨던 감독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에게 과도한 러브라인을 부여하고, 지나치게 사적인 트라우마를 설정해 성차별적인 구조를 조장했다는 혐의에 시달렸다. 그의 의도와 별개로, 블랙 위도우가 애정관계를 통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새삼 드러내고, 불임을 트라우마로 고백함으로써 ‘불완전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덧입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히어로들이 원대한 임무와 숙명을 고민할 때 유독 여성인 블랙 위도우만이 사적인 특징을 부각시킨다. 초대형 블록버스터에서 벌어지는 이 논란은 첩보물에서 여성을 그대로 그려내며 자리를 마련해주는 폴 페이그의 태도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시대가 변하면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여성 캐릭터의 비중은 높아졌다. 조스 웨던의 세계에서 여성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여성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섹시하며 평면적인 이미지 이상의 담론을 유도하지 않는다. [스파이]나 여성 제작자들이 참여하는 TV 시리즈 [에이전트 카터]의 시선은 이 문제에서 진일보한 시선을 담아낸다. 캡틴 아메리카가 자취를 감춘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에이전트 카터]에서 주인공인 페기 카터(헤일리 앳웰)는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자 만연한 성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어내는 여성이다. 캡틴 아메리카의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 요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드라마를 배경으로 적군과 몸싸움을 벌이고 사건을 해결하는 그녀를 통해, 작품은 여성이 활약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들의 활약을 세상이 정당하게 기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스파이]와 [에이전트 카터]는 지금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늘어난 비중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사려 깊은 이해와 고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폴 페이그는 자신이 연출할 새로운 버전의 [고스트버스터즈]의 주인공으로 멜리사 맥카시를 비롯한 여성 배우들을 캐스팅할 것을 발표했다. 환영과 우려가 엇갈리는 가운데, 그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기획한 이유에 대해 담백하게 “웃긴 여자들과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혔으며 여전히 여성 코미디언들에게 부당한 걱정이 덧붙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패거리 코미디를, 짝패 형사와 스파이를 여성의 영역으로 차입한 감독은 또 한 번 여성 코미디의 울타리를 넓힐 수 있을까. 적어도 폴 페이그가 지금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을 누구보다 정당하게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글. 윤희성(객원기자)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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