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인베이젼│① 우리 밖의 일베와 실전에서 싸우는 법

2015.04.14


인생은 실전이다. 공교롭게도 만우절인 지난 4월 1일,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 헤비유저 출신으로 알려진 KBS 수습기자가 정직원으로 뽑히는 걸 보며 든 생각이다. 생리 휴가를 쓰는 여성은 사용한 생리대를 증거로 제출해야 한다는 식의 여성 혐오 및 차별, 5.18은 폭동이라는 식의 역사적 몰이해와 지역 차별의 글을 일베에 올렸던 해당 기자에 대해 KBS 보도국을 비롯한 내부 구성원들 상당수는 정식 임용을 반대했지만, KBS는 수습 기간 중에 올린 글이 아닌 만큼 명분이 부족하다며 임용을 승인했다. 온라인에서 차별적이고 악의적인 발언과 댓글을 달다가 오프라인에서 혼쭐이 난 이들에 대해 흔히 인생은 실전이라고 놀렸지만, 이번만큼은 인생이라는 실전에서 그 일베 출신 기자는 한 차례 승리한 셈이다. 분명 이 승리는 일베에 있어 기념비적인 쾌거다.

특유의 과감하고 과격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일베 유저들에게 소위 ‘일밍아웃’(자신이 일베 유저임을 밝히는 일)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으로 비하했던 유저가 모욕죄로 입건된 것처럼, 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그들은 적어도 오프라인의 시민사회에서까지 당당하게 자신의 성향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이 일삼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는 일상 세계의 도덕률 안에서 허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번 일베 기자의 입사야말로 지금까지의 전세를 유의미하게 바꾼 사건인 건 그래서다. 단순히 일베 용어를 쓴 수준을 넘어 앞서 인용한 문제적인 발언을 게시판에 올린 것을 들키고도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 입사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지된다고 믿었던 시민사회의 방어선에 균열이 생긴 것을 보여준다. 차별적인 발언을 한 것이 화제는 될지언정 실질적인 불이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일베라는 공간 안에서 그런 잘못된 발언을 올리는 것을 넘어 일상 영역에서 그러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제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번 인사가 공영방송 KBS에서 벌어졌기에 더 민감하지만, 또한 KBS라는 한 조직의 문제만으로도 볼 수 없는 건 이 지점이다.


다시 말해 이번 KBS 기자 입사 건은 일상 영역에서 우리 사회가 일베로 대표되는 차별적인 담론의 지지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올바른 것이냐는 문제로 넘어간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박권일은 이를 일베스럽지 않게 일베와 싸워야 할 의무라는 명제로 요약했다. 하지만 이 명제에서도 전제되는 건 이것이 결국 싸움이라는 것이다. 온라인 게시판에서의 논쟁을 넘어선 이것은, 요컨대 실전의 영역이다.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까지 포함해, 이 영역에서 일베에 대한 대항은 실천적 차원에서의 싸움의 기술로 접근해야 한다. 때문에 KBS 기자 입사에 대한 유보적인 성찰들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으로는 어느 정도 무책임하다.

가령 박권일은 미래의 사상검증의 피해자를 우려하며 일베 기자를 배제하는 것에 신중하게 접근하길 제언하지만, 정작 역사적으로 그러한 사상검증을 정당화했던 건 바로 일베 기자가 보여준 것과 같은 혐오와 차별의 정당화였다. 그걸 막기 위해 제도적 규칙의 범위 안에서 구체적 혐오 행위를 배제하자는 주장을 일베의 차별 메커니즘과 동일선상에 놓고 우려하는 건 과하다. [한겨레] 이재훈 기자는 ‘사실로 확인할 수 없는 감정이나 성향을 사실화해서 처벌하거나 징계하는 것은 시스템을 배제하는 파시즘적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특정 개인에 대한 배제’보다 ‘혐오 행위를 걸러낼 수 있는 제도적 혹은 사회적 시스템’을 고민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우선 팩트에 있어 KBS 보도국의 취재원에 따르면, 이재훈 기자가 추리한 것과 달리 해당 기자가 일베 유저인 게 밝혀진 건, 입사 당시 개인 SNS에 일베의 그것과 흡사한 남성연대에 대한 멘션을 올린 사실이 건너 건너 보도국 사람들에게 전해져서다. 비록 일베에 올린 것만큼 강성 발언은 아니지만 비슷한 사고의 궤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일베 활동을 ‘사실로 확인할 수 없는 감정이나 성향’이라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또한 혐오 발언을 버젓이 올린 개인을 배제할 정도의 강제성이 없다면 현실 영역에서 혐오 행위를 걸러내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김소희 역시 [씨네 21] ‘오마이이슈’ 코너에서 ‘조직의 공적 책무는 멘탈이나 인격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시스템으로서의 인사에 구멍이 났다는 기초적이고도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이들은 강력한 차별적 폭력에 대항하는 한 줌의 반폭력마저 비판하다가,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강제성에 대해서까지 일베스럽거나 파시즘적일지 모른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메를로 퐁티가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지적하듯,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폭력 없이 폭력과 싸우는 법을 고민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게 폭력에 대한 불가피한 폭력이 틀렸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말대로 어떤 이념을 배제할 선험적 기준은 없으며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바로 그 합의가 진행되려면 이상적 논증 게임의 조건을 충족하는 제도적 규범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해당 일베 기자의 혐오 발언은 이미 이 규범에 미달한다. 우리는 당연히 일베스럽지 않게 일베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강제적인 것과 폭력적인 것은 다르며, 폭력적인 것과 일베스러운 것은 또 다르다. 그 결을 놓치게 되는 순간 모든 종류의 폭력 비판은 실천적으로는 가장 강하고 저열한 폭력을 묵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폭력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여 우리는 KBS 일베 기자 채용을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감정적인 선언처럼 들린다면 이렇게 풀어서 말할 수도 있다. 저 생득적인 요소로 타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사회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가장 덜 폭력적인 거리에서 그럼에도 현실적 힘이 있는 한계선을 그어야 하며, 공익을 위해 존재하는 공영방송이 절차상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건 그 선을 긋는 한 획이 될 거라고. 우리 안의 일베와 싸우기 위한 성찰의 자유조차 우리 바깥의 일베와 대척하는 이 방어선 안쪽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실전이다. 그리고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발언을 한 상대가 버젓이 승리를 챙겨가고 있다. 이것은 상식적인 세계의 1패다. 대체 여기 어디에 정의가 있는가. 이 싸움에서 우리가 물러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글. 위근우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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