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디어 라이프], 아주 보통의 삶에게

2015.04.03

나의 인생을 소설로 써야 한다면 장편이 될까 단편이 될까. 장편으로도 모자라 열 권이 넘어가는 대하소설이 될 거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인 내게 그런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실은 대부분의 삶이 그러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숨겨진 이야기가 있지만 그 면면을 들추어보면 다들 조금씩 바래지거나 눅눅해진 기억일 뿐,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멋진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보통의 우리들이 아닐 테다.

다행히 [디어 라이프]의 작가 앨리스 먼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거장임에도(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보통의 인생에 관심이 더 많은 듯하다. “인생은 절대 예측불허지”(‘돌리’)라고 말해놓고도 결국 평소 그대로 돌아가고 마는 삶 말이다. 하지만 앨리스 먼로는 그 반복되는 일상에 균열이 벌어지는 순간을 예의 주시하고, 그 후의 인생이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문장으로 남기는 작가이기도 하다. 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사건이나 절정의 찬란한 순간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자연스러운 상실과 그 상실이 남기고 간 가슴의 구멍을 묘사하는 데 더 힘을 기울이며 작가는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보편의 인생. 언제나 조금씩 늦고, 불행을 불러오는 일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가슴에 구멍이 나고 나서야, “달리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코리’)

어린 시절 언니의 죽음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자신을 몇 번이고 되새기는 화자가 등장하는 ‘자갈’에서, 심리치료사는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라고 말한다. 죄의식에 빠져서는 안 되며,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것이기에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보통 그 정도의 자리에서 대개의 소설은 멈춘다. 하지만 이 소설 속 마지막 네 문장은, 소설가의 일은 심리치료사의 일과는 다르다는 선언처럼 덧붙여진다. 인간은 왜 정말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가지 않는가. 왜 인간은 과거의 어떤 순간에 “붙들려” 있는가. 인간은, 혹은 인생은 도대체 왜. 언제나 좋은 소설은 거기까지 간다.

그렇다고 앨리스 먼로가 그리는 인생이 모두 비관적이라거나 고통 속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래도 “어떻게 지내요?”라는 질문에 “잘 지내요”라고 대답할 만큼의 인생은 살아가고 있다. 굳이 그 말에 “행복하게”라고 덧붙이더라도 거짓말은 아닌 삶이다.(‘아문센’) 그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조금 슬프고,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가진 것이 없고, 생의 대부분을 진실이 아닌 무언가에 쏟아버렸다 하더라도,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코리’)는 사실을 안다. 한 권 분량의 연작소설을 제외한다면 평생 단편 소설만 써온 이 작가는 노년에 쓴 작품들로 엮은 이 마지막 작품집에 이르러 자신이 온 생애를 지나오며 알게 된 진실을 조금 털어놓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모두의 얼굴이 고통을 경험했다. 당신의 얼굴만이 아니라.”(‘자존심’)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삶이 변하거나 ‘나 자신’이 변하는 순간은 어쩌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때에 오거나 혹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놓쳐버린 생의 한 장면을 통해 우리의 삶 전부를 재구성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나와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이의 아주 일부를 들여다보면서, 내 인생의 스쳐간 찰나를 기억해내고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 이런 앨리스 먼로의 방식으로, 우리의 인생은 단편 소설이 될 수 있다. 잠 못 드는 밤 문득 찾아온 기억,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어떤 순간, 덧칠을 하도 많이 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인생의 한 장면이라도, 우리는 모두 소설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좋은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스 먼로는 ‘아문센’ 주인공의 입을 빌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실은 인생도, 문학도 그렇다.

윤이나
보험과 연금의 혜택을 호주 공장에서 일할 때만 받아본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책도 읽고, 영화와 공연도 보고, 축구도 보고, 춤도 추고, 원고 청탁 전화도 받는다. 보통 노는 것같이 보이지만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이다.

디자인. 전유림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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