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요한 “1초의 공기도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2015.01.12
리듬이었다. tvN [미생]의, 놀라울 만큼 적재적소에 배치된 배우들 사이에서도 그가 등장할 때마다 공기는 한층 더 생동감을 띠었다. 언뜻 경박해 보이지만 사랑스러운, 코믹하지만 우스워 보이지 않는 신입사원 한석율 역에 변요한을 캐스팅한 것은 제작진의 묘수였다. 독립영화 팬이 아닌 대중에게는 아직 낯설었던 이 배우는 어떤 시간을 거쳐 왔으며 어떻게 첫 드라마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승부할 수 있었을까. 심상치 않은 배우, 변요한을 만났다.

김원석 감독이 한석율 역을 맡기며 ‘창의적으로’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들었다. 해석의 권한을 얻는 만큼 부담도 크지 않았나.
변요한
: 촬영이 끝나는 순간까지 고민이 많았다. 편하게 할 수 있는 대사도 있지만 한석율의 포지션이 힘을 주어야 할 때, 원 인터내셔널 안을 날아다닐 때는 많이 힘들었다. 모르는 부분은 감독님 말씀을 들었다. 감독님은 모든 인물의 호흡과, 각자의 성격이 어디까지 증폭될 수 있는지 알고 계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 배우들이 나를 한석율로 봐줬다. 용기 있게, 확고하게 들어가야 할 때 그들의 눈에서 믿음을 느꼈다.

한석율은 가벼워 보이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심지가 곧은 인물인데, 이 사람의 바탕은 어떻게 이루어진 거라 생각했나.
변요한
: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공감대가 생겨나는 것처럼, 내가 맡는 캐릭터와도 서로 공감하는 지점이 있다. 4화 프레젠테이션 신에서도 알 수 있듯 한석율은 가족, 친척들, 현장 아저씨들로부터 두루두루 사랑받는 사람이다. 16화에서 공장 아저씨에게 맞아서 다쳤을 때도 한 분은 남아서 걱정해주고 대화를 나눠주지 않나. 한석율이 많이 사랑받는 건 그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그런 부분이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성 대리(태인호)가 업체 사람과 불륜 관계라는 걸 알아도 폭로하지 않는 것 역시, 나라도 그랬을 거다.

대사 외에 눈짓, 손짓, 걸음걸이 등 신체 언어의 디테일이 모여 한석율이라는 인물을 완성시킨 것 같다.
변요한
: 어려웠지만 고민했다. 1초의 공기도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작가님이 써주신 대본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지키면서, 말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웹툰에서 한석율은 오래 등장한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작가님과 감독님이 드라마에 이 인물이 계속 나올 수 있는 포지션을 주셨다. 그래서 웹툰을 보셨던 분들이 그러셨듯, 드라마가 끝났을 때도 한석율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다. 한석율이 멈추면 원 인터내셔널이 멈춘다는 생각으로, 항상 이 신에 한석율이 왜 등장하는 것인가에 의문을 가졌다. 다른 두 사람만 있어도 되는 신에 한석율은 왜 나올까.

10화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다 안영이(강소라)에게 인사하고 하 대리(전석호) 뒤에서 에베베베~ 하는 표정을 짓는 신이 기억에 남는다.
변요한
: 그 직전에 한석율은 주먹을 쥐고 있다. 사수인 성 대리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 반차를 내고 뛰쳐나왔는데, 한석율도 외로운 거다.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고, 퇴근하기 전 동기들 얼굴을 보면 힘이 날 것 같아서 이 층에 왔는데 안영이가 하 대리에게 당하고 있는 걸 본 거다. 그러니까 그 표정은 안영이에게 ‘이 상황은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응원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하 대리를 향한 거지만 내 상사에게 모욕을 주는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런 여러 가지 감정과 한석율의 동기애가 맞물렸던 것 같다.

회사원의 양복 차림은 대개 비슷해 보이지만 한석율은 비교적 화려한 색상과 패턴의 셔츠나 넥타이, 양말 등 의상으로도 자신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고민의 결과였나.
변요한
: 처음에는 작가님과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그림이 무엇인지 들었고, 두 번째는 스타일리스트와 현장에서 감독님을 같이 만났다. ‘2% 부족한 패셔니스타’라는 설정을 어떻게 구체화시킬까 고민하다 스타일리스트와 낸 아이디어가 ‘깔맞춤’이었다. 한석율은 촌스러운 사람도, 우스운 사람도 아니고 자기만의 멋이 있는데 그게 한순간에 생겨난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집에서도 카디건을 입는 사람인데, 보통 남자들은 집에서 반바지를 걸치거나 그냥 안 입기도 하지 않나. (웃음) 원래 꾸준하게 패션에 신경 쓰는 친구고, 전체적인 밸런스도 그럴싸한데 현미경으로 보면 벨트와 양말 색깔을 맞추는 사람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세 번째로 갈 때는 스타일리스트도 이게 안 통하면 스타일리스트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를 하고 갔는데, 감독님이 ‘이거다!’ 하면서 좋아하셨다.


군 제대 후 스물네 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했다. 같은 꿈, 목표를 가진 사람들 안에 들어가 자신의 재능과 위치를 가늠하게 되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
변요한
: 무너졌던 순간이 많았다. 입학하는 순간부터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물론 절대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웃음) 사실 어린 친구들의 감정 표현이나 움직임을 보면서 놀랄 때가 많았다. 자극도 많이 받았고, 나중에는 인정을 해버렸다. 여기는 정말 치열하게 경쟁 구도를 만들어서 1등이 정해지고, 또 1등이 바뀌어버리는 걸 매번 경험하게 해주는 학교라는 걸. 그래서 다 내려놓고 미친놈처럼 가기로 했다. 어차피 한예종 자체가 나이는 크게 중요치 않은 곳이라 동기 중에 스물일곱 살 형도 있었고 나는 중간 정도였다. 그래서 나이 먹고 들어갔다는 부담감 없이, 그냥 놀기로 했다. 비비탄 총 들고 캠퍼스에서 뛰어다니기도 하고,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혹시 한순간이라도 내가 1등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 있나.
변요한
: 있다. (웃음) 공연 준비할 때, 연기 잘하는 친구가 있으면 파트너한테 살짝 그 친구 연습하는 것 좀 보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마치고 집에 가면 “우리 쟤보다 연습 1분만 더 하고 가자” 그러고, 정말 딱 1분 더 하고 가면서 “우린 내일 발표 좀 못 해도 돼. 우리가 오늘 이 학교에서 노력을 제일 많이 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웃음) 그러다 연극 [햄릿]을 했을 때 선생님께서 동기들 앞에서 우리 조를 칭찬하시면서 “너희가 대극장을 채우려면 이 정도 에너지는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들었지만 나가시는 순간 하이파이브를 하고 난리였다. 다음 발표 때까지는 그 신나는 기분을 누리는 거다. 학교생활 하면서 모두들 그런 경험을 하며 배우기도 하고, 겸손해지기도 한 것 같다. 지금은 활동 때문에 휴학 중이지만 여전히 내가 힐링하는 곳은 학교다. 후배들 연습하는 걸 보러 가기도 하고, 연극 공연이 있으면 꼭 간다.

학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변요한
: 거짓말하지 않기. 연기할 때, 사랑할 때. 수업 중에 연기하면서 ‘뭐뭐 하는 척’하면 선생님이 그만하고 나가라고 하셨다. 학교에서 무대에 대한 지식이나 연기에 좋은 습관을 만드는 법, 오감을 뛰어넘고 육감을 기르는 방법 등 정말 좋은 커리큘럼으로 많이 배웠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거짓말하지 말기였다. 우리 학교 애들은 다 그럴 거다.

사실 나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일 때도 있지 않나.
변요한
: 사실 남에게 그걸 들키는 건 되게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Don’t lie”에는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더 깊이 들어가라, 더 믿어라, 거짓말을 하려면 차라리 확신을 가지고 해라.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없이 대본을 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자기 캐릭터를 연구하면서 그의 종교, 취미 등등 온갖 걸 다 쓴다. 말도 안 되는 것까지도. 그런다바로 연기를 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던 친구들이 1년, 2년 지나면 확 늘어 있다. 그건 결국 “Don’t lie”의 힘인 것 같다.

여동생도 배우 겸 감독지망생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비슷한 길을 가게 된 건가.
변요한
: 원래 어릴 때 연극을 같이 시작했다.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내가 예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졸업 후 중국에 유학을 갔는데, 어느 날 동생이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다는 거다. 한 번이라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동생까지 연기를 하면 나는 허락받기가 더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시험을 보길 바랐고, 부모님도 ‘설마 붙으랴’ 하고 허락하셨는데 붙어버렸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받아들이셨다. (웃음) 반대하셨던 일이라도 인정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동생은 나보다 연기도 잘하고 좋은 생각과 에너지,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

가족이면서 친구, 좋은 동료인 것 같다.
변요한
: 한 살 차이라 많이 친하고, 많이 싸우기도 하지만 정말 든든한 친구다. 전에는 동생이 나더러 동생 같다고 했는데 요즘엔 “친구 같지만 확실히 오빠는 오빠인 것 같다”고 한다. 지금도 힘든 일이나 연기에 있어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전화를 한다. 그래도 안 풀리면 인천 집까지 찾아간다.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힘이 된다. 영화 시나리오도 쓰지만 연극을 굉장히 사랑하는 친구인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동생이 더 편안하게 즐기면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올해 서른이다. 20대 때는 아버지가 ‘연기 쉽게 하지 말라’며 상업적인 방향으로 가는 걸 경계하셨다던데, 배우에게는 젊음도 재산이지 않나. 그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변요한
: 아버지한테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면 어떡해요?”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평생 하면 돼” 그 한마디로 정리가 끝났다. (웃음) “그래도 10대, 20대가 가지고 있는 체형이나 느낌이 있는데…” 했더니 “관리해” 딱 그러셨다. 사실 나이가 20대라고 해서 다 20대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애 같은 사람도 있고, 아주 나이가 많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버지는 외형적인 것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과 눈높이를 맞춰 듣고 말하고 가능성을 키우는 것을 중시하신 것 같다. 실제로 아버지가 어린아이부터 노인분들까지 모든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점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닮으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도 그런 의미다.

[미생]을 통해 많은 기대를 모으는 배우가 됐다.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스스로 무엇을 증명하고 싶나.
변요한
: 기대해주시는 건 감사하게 받겠지만, 내가 하던 대로 할 거다. 벌써 이렇게 말하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데, 언젠가 나도 더 이상 연기를 하지 못하게 될 시기가 올 거다. 그때 사람들로부터 변요한이 그립다, 그 배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게 목표다.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내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없다. 사실, 지금은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글. 최지은
사진. 이진혁(KoiWorks)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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